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민주주의의 정신을 가둔 옛 서울구치소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동양 최대 규모의 감옥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가려면 서울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내려야 한다. 역사관을 포함하고 있는 독립공원이 그곳에 있고, 독립공원은 독립문 때문에 조성된 곳이니 역 이름이 독립문역인 것은 새삼스러울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곳에 취재를 오면서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관계가 새삼스러워졌다.

 

전자는 우리나라가 중국, 일본, 러시아와 그 밖의 서구 열강과 마찬가지의 자주독립 국가임을 국내외에 선포하기 위해 1897년에 완공하였고, 후자는 그 11년 뒤인 1908년에 일본이 항일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의 규모로 지은 감옥이다. 이 둘이 한 공간 안에 있다. 원래 독립문은 현재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7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어쨌든 서대문형무소, 당시의 이름인 경성감옥이 지척에 있긴 매한가지다.

 

일제가 우리나라의 독립 의지를 꺾고자 계획적으로 택한 장소라고 할 밖에. 모르긴 해도 독립문이 일제로부터 독립을 하고 난 뒤 세워진 것이라면 그 둘의 위치가 자연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서대문형무소는 근대적 시설을 갖춘 한국 최초의 감옥으로 독립 이후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1988년부터 지금의 역사관으로 이름과 함께 그 용도가 바뀌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관람하는 일은 일제 강점기 때 독립투사들의 자기 헌신과 일제의 잔악무도를 보고 느끼는 일이다. 식민지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은 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일제가 형무소를 운영한 37년이라는 세월보다 더 긴 42년 동안 이곳은 한국 사법부에 의해 운영되었고, 1945년 이래로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다 이곳에 수감된 사람들 또한 얼마나 많았겠는가. 이곳을 취재하는 동안 나는 잊혀진 역사를, 묻혀진 역사를 ‘발굴’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항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의 흔적

“우리가 우리 스스로 저지른 잘못된 역사에 대해 인정할 때만이 외부로부터 당한 고통의 역사를 제대로, 떳떳하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만난 이덕희 씨(49세, 환경운동연합 국제협력위원장)가 인터뷰 말미에 던진 말이다. 서울에 살던 때, 서울시민이라면 여기도 한번 들러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무감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찾은 적이 있던 나는 이덕희 씨의 말에 깊은 공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른 많은 관람객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1945년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만 ‘관람’할 수밖에 없었고, 이번 취재를 위해 사전조사를 하는 동안 이곳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는 사실에 놀라워했기 때문이다.


이덕희 씨는 1980년대 학생운동의 선두에 서 있던 인물이다. 서울대학교 미생물학과 77학번으로 대학원에 다니고 있던 그는 1981년 2월 27일, 같은 학교 복학생인 이선근이 주도해 만든 전민학련(전국민주학생연맹)의 결성 멤버였고, 무엇보다 신군부의 죄상을 학생들에게 알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해 그해 봄, 학원가의 시위를 이끌었다. 3월부터 5월까지 전국적으로 모두 아홉 차례의 시위가 전민학련의 지도 아래 일어났다. 

 

급기야 5월 27일 서울대 도서관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 김태훈이 투신자살하기에 이르렀고, 학원가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에 휩싸였다.
이에 공안당국이 전민학련 결성을 주도한 이선근과 전민학련 결성에도 관여하였고 전민노련(전국민주노동자연맹) 결성을 주도한 이태복을 연행하면서 조직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검찰은 전민학련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했다. 검찰이 지금까지 규정한 반국가단체 중 그 어떤 조직도 국가 전복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전민학련의 경우도 또다시 이와 유사한 운동단체가 출현할까 두려워한 신군부가 족쇄를 채운 것이다. 이로써 전민학련은 학생조직체 중 반국가단체 혐의를 쓴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두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만 30여 명이었고, 이덕희 씨도 그해 6월에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었다가 용산경찰서 유치장을 거쳐 8월에 이곳 서울구치소로 이송되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누구든 항상 캄캄한 밤에 이곳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시국사범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게 마련이었으니, 이송될 때도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야심한 시간을 이용한 모양이었다.

 

‘뺑기통’과 ‘통방’

인터뷰를 약속한 그날은 마침 정기 휴관일인 월요일이어서 공문을 통해 취재 허락을 따로 받아야 했다. 역사관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조용한 옥사를 둘러볼 수 있어 오히려 잘 된 셈이었다.

 

그는 소년수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에 10사(舍)에 수감되었는데, 당시의 10사는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면서 사라졌고, 현재 10사는 일제 강점기 때의 번호로 복원된 것이라 한다. 우리는 대신 중앙사를 둘러보았는데, 당시 공안사범을 수용하기 위해 모두 독방으로 나뉘어져

 

 

  


있던 10사와는 달리 중앙사는 일제 강점기 때의 형태로 여러 명을 수감할 수 있는 크기의 방이거나 바깥문을 열고 들어가면 측면으로 세 개의 문이 나란히 나 있는 독방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다. 0.75평 크기의 현재 독방보다는 조금 더 컸던 10사의 독방에는 이른바 ‘뺑끼통’이라 불리던 변기가 들어 있는 화장실로 통하는 문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이덕희 씨는 이곳에서 1심과 2심을 합해 통상 기다려야 하는 기간인 10개월을 다 채우고 광주교도소로 이송되었고, 이후 청주교도소에서 형량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도 이곳에 들어온 시국사범만 많게는 백여 명에 이르렀으니, 당시 남영동 대공분실의 고문실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면 모두 이곳을 거쳐 갔다고 해도 그리 틀린 추측은 아닐 것이다. 감방이 시국사범들로 넘쳐났으니, 교도소 분위기는 그들이 좌우하기에 충분했다.

 

배식 담당인 소지(교도관 보조역을 맡은 일반사범 기결수)가 밥을 넣어주면서 누가 몇 호실에 새로 들어왔는지 알려주곤 했다. 그러면 하루에 한 번 있는 운동시간에 방 앞을 지나면서 알은 체를 했으며, 또 ‘통방’이라고 야심한 밤에 창을 통해 큰소리로 서로를 부르며 정보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엄혹한 시대 상황 하에서, 그것도 감방 안에서 그러한 일들이 가능했다고 하니, 역사 드라마나 소설을 통해 벽을 두드려 모스 부호처럼 은밀하게 ‘통방’하던 장면을 떠올릴 수밖에 없던 나는 매우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는 교도관들도 우리 편이었어요. 하급 공무원들이니 대우도 나빴고, 대부분이 시대 상황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호적이었죠. 가능한 한 우리 편의를 봐주려고 했어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교도관들로부터 린치를 당하거나 필요 이상의 제지를 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몸은 감방 안에 있지만 모든 안테나는 바깥 세상을 향하고 있었으니, 통방 등을 통한 정보 교류는 가뭄에 단비처럼 숨통을 틔워주는 반갑고 소중한 것이었으리라.

 

당시 이곳에 수감되었던 시국사범들은 서로 모르는 얼굴이라도, 서로 다른 사건이라도 모두 동지라는 강한 연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국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누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왔는지, 재판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고 한다.

오무라이스 패통

감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덕희 씨는 아주 반가운 것이 생각난 듯 성큼성큼 걸어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문과 연결된 벽 안쪽을 가리켰는데, 그곳에는 바통 굵기만 한 구멍이 복도를 향해 뚫려 있었고, 구멍 속에는 아주 옹골져 보이는 원통형의 나무 막대가 끼워져 있었다. 다시 복도로 나가서 보니, 같은 모양의 나무 막대가 세로로 세워져 있었고, 떨어지지 않게 막대 아래쪽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을 ‘패통’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역사관 직원은 견학 온 아이들에게 ‘인터폰’이라고 설명하면 금방 알아듣는다고 귀띔해 주었다. 우리 역시 금방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재소자가 교도관에게 용무가 있을 때 방 안에서 구멍에 걸려 있는 나무 막대를 손바닥으로 탁 치면, 그 나무 막대가 밀리면서 바깥쪽에 세로로 세워진 나무 막대를 치게 되고, 그러면 세로 막대가 떨어지면서 아래쪽 나무판과 부딪쳐 ‘딱’ 하고 소리를 내게 된다. 이것을 ‘패통친다’라고 하는데, 직원의 귀띔대로 인터폰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이다. 스산한 적막이 감도는 감방에서 그 옹골진 나무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는 복도 전체를 울릴 만큼 크게 들렸다. 경성감옥 시절부터 사용하던 것이라고 하니, 패통이야말로 80여 년 동안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간 수많은 재소자들의 손길을 간직한 말 없는 ‘증언자’가 아닐까.


이덕희 씨는 패통에 얽힌 전설 하나를 들려주었다. 일명 ‘오므라이스 패통’ 이야기다. 사형수 하나가 사형일에 오므라이스를 마지막으로 먹고 싶다며 교도관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오므라이스를 먹지 못한 채 사형을 당하고 말았는데 그날 밤, 아무도 없는 그 방에서 ‘딱!’ 하고 패통 울리는 소리가 난 것이었다. 그 사형수가 시국사범이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합법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사형제도 역시 부당한 살인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나로선 정말 원귀가 나타나 패통을 친 것 같아 소름이 오싹 돋았다.


소리 소문 없이 끌려와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하고 서울구치소로 이송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또 1심, 2심 재판을 받는 동안 많은 시국사범들은 상당한 심리적 공포와 불안감을 안고 지내야 했다. 덧붙여 이덕희 씨는 민주화에 대한 갈망과 용기가 컸던 만큼 너무 빨리 와해된 조직에 대한 안타까움과 오래 버티지 못하고 끌려와야 했던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 또한 클 수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서대문형무소, 옛 서울구치소

일제는 몇 백 년을 내다보고 튼튼하게 감옥을 지었고, 그 덕에 군사정권이 수십 년 동안 제대로(?) 사용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는 그 절반도 안 되는 역사만 보존되고 있다. 이덕희 씨에게 다시 이곳, 옛 서울구치소를 찾은 감회를 묻자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은 독립투사들만이 아니지요.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다 이곳에 수감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역사관도 이곳에 함께 있어야 합니다.”라며, ‘삭제’되어 버린 역사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독립하기 전에 세워진 독립문이 마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처럼 느끼게 하는 독립공원과 그 속에 함께 들어 있는 서대문형무소처럼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아 부조리를 느낄 수밖에 없는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역사관으로 개관할 당시 역시 군사독재정권 시절이었으니,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다. 그렇다면 문민정부를 지나 참여정부의 집권 중반을 넘어선 지금, 민주화운동을 올곧게 기념하려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재정비 사업도 빠뜨리지 말라고 주문하고 싶다. 언젠가는 많은 학생들이 선배 세대들이 누락시킨 치욕의 역사를 이곳에서 보고 느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류외향
1973년 경남 합천 출생
1996년 대구 매일신문으로 등단
시집으로 『꿈꾸는 자는 유죄다』가 있음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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