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유신의 배를 가른 지성의 숨결 서울농대 수원캠퍼스

 

 

 

 

1975년 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이 나라의 헌법을 제멋대로 난도질하며 독재를 횡행하다 마침내 10월 유신을 통해 자신의 영구집권 야욕을 충족시키고 포만감에 젖어 있을 때, 쉬쉬하며 숨죽여 엎드린 세상을 향해 ‘공포의 병영국가’가 도래했음을 고발하며 자신의 배를 가른 지성이 있었다. 그가 김상진(서울대 68학번, 당시 4학년으로 26세)이다.


폭염 속을 돌아다니며 고(故) 김상진 군의 할복사건을 취재하는 동안, 필자의 머릿속에는 러시아 네차예프사건에 관한 상념이 내내 자리하고 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꽃다운 젊음이 고뇌 끝에 선택한 죽음에 대해 그 사실을 기록하기야 간단한 일이겠지만 그 진실을 말하는 일은 쉽지 않은 까닭일 터이다.


네차예프사건은 1869년 겨울, 제정러시아 내 비밀결사를 운영하던 세르게이 네차예프가 조직의 목적인 민중봉기를 위해 조직원 이반 이바노프를 희생양으로 삼아 살해한 사건이다. 물론 네차예프사건과 달리, 김상진은 당시 국민들의 머리 위에 뒤덮인 유신독재의 장막을 고발하기 위해 스스로의 의지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런데 어째서 필자는 줄곧 네차예프사건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일까.  


할복사건의 현장에 남은 느티나무

김상진기념사업회 김원일 사무국장(서울대 84학번, 42세)과 함께 방문한 할복사건의 현장, 서울대 농대 수원캠퍼스의 건물 6동 앞 교정에는 잡초가 웃자랐고 건물 철거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농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뒤 수원캠퍼스는 매각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1975년 당시, 사건이 벌어졌던 교정에는 그의 선혈이 물들었던 곳임을 알리는 기념 표석만이 외로이 남아 있었다.


“바로 이 자리였죠. 학생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김상진 형이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과 <양심선언문>을 읽은 뒤 준비한 과도를 꺼내들고 자결을 결행했어요. 당시엔 이 뒤편에 백양나무가 서있었는데…….”
김원일 사무국장은 표석 뒤에서 마치 누군가 쉴 수 있도록 일부러 그러고 있기라도 한 듯 팔을 벌려 표석 위로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선 느티나무를 가리켰다.


“학생들은 도서관 앞에서 스크럼을 짜고 형이 자결한 이 잔디밭을 돌아 교문 밖 수원 시내로 진출하곤 했죠. 근래에 매각이 확정된 부지는 캠퍼스 반쪽 정도여서 이 공간은 그대로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어요.” 수원캠퍼스의 관악 이전과 함께 당시 사건을 증명하고 보전해줄 표식들은 하나 둘 관악으로 옮겨졌지만, 기념사업회 측은 의거 현장의 의미에 주목해 표석이 있는 곳에 기념조형물을 설치할 계획이라고 알려줬다.

 

이 사업은 현재 <임옥상미술연구소>에 위탁해 추진되고 있다.  

청년, 김상진

김상진은 서울 출신으로 보성 중·고교를 졸업하고 1968년 서울대에 입학했다. 1975년 4월 11일, 농대 교정에서 양심선언문을 낭독하고 자결했으며 다음날인 12일 오전 8시 55분 서울대병원으로 이송 도중 운명했다. 그의 생애에 관한 기록들은 두 권의 책, 『긴 겨울 얼음 뚫고』(김상진기념사업회, 녹두 발행, 1995)와 시대의 불꽃 『김상진』(김남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발행, 2003)에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사건 당일을 전후한 김상진의 심경과 행보에 대해서는 이병호 통일농수산사업단 이사(서울대 75학번, 50세)와 안종건 방송통신대 교수(서울대 68학번, 56세)를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양재동 사무실에서 만난 이병호 이사는 개성공단 내 양돈장 설치를 위해 북한 방문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기꺼이 취재에 응해주었다.
“민주화 세력들이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생산적인 사업을 추진하고 사회변화의 동력이 되는 것이 청년 김상진의 죽음을 빛바래게 하지 않고 계승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이병호 이사는 남북한 사이에 교류 중인 농기계와 농법, 농업 육성제도 등에 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사건 당시 학우들과 함께 현장을 목격했다. 또한, 김상진이 몸담았던 사회과학 연구 동아리 ‘한얼’의 멤버이기도 했다. 동아리에서 그의 눈에 비친 선배 김상진은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성품이면서 치밀하고 논리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건 토론을 벌일 때였어요. 후배들을 대할 때면 상당히 나이브한 성격이었지요.”


서울대 농대생들은 1학년 때에는 수원 교내기숙사에서 합숙했는데 김상진 역시 기숙사 생활을 하다 2학년 때부터 동아리 멤버들이 함께 기거하는 캠퍼스 부근의 ‘푸른 여관’에 거처를 두고 드나들었다. 자연, 필자는 동아리 한얼에 대한 이야기로 건너갔는데 제약된 인터뷰 시간 탓인지 이병호 이사는 간단하게 짚고 넘어갔다.
“사회과학 분야에 관련된 세미나를 주로 했지요. 사건 이후로 유신정권의 감시가 심해져서 한얼 멤버들은 입대하거나 휴학, 졸업으로 뿔뿔이 흩어져 와해됐어요.”


그의 눈에 비친 선배 김상진의 할복 결심은 당시 시위로 구속 중이던 동료학우들 문제도 있었지만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의 사형집행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거라고 술회했다.


다른 각도에서 좀더 구체적인 김상진의 실루엣을 붙잡아보고자 고인과 보성고 동기이자 서울대 농대 동기인 안종건 교수를 찾아간 날은 대학로 아스팔트 위로 쏟아 붓는 8월 염천에도 불구하고 필자에겐 의미 깊은 시간이 되었다.
연구실에 도착해 취재수첩을 펴고 흘러내린 땀을 닦느라 부산스러운 필자에게 안 교수는 수박 두 쪽을 쪼개 불쑥 디밀었다.
“일단 좀 들고 하지?”
 

 

 

 

그제야 필자는 준비했던 질문과 답변의 미로에서 빠져나와 네 평 남짓한 안종건 교수의 연구실을 새삼 둘러보게 됐다. 벽 양쪽의 책장 사이로 열차 대합실처럼 배치된 널찍한 책상들 위에 농학관계 연구자료와 서류들이 어지러이 포개고 펼쳐져 찻잔 하나 내려놓을 틈새도 없어 보였는데 그 모양새가 꼭 필자의 작업실 풍경이었다. 취재란 어쩌면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사이에 진행되는 질문과 답변 속에서만 구해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종건 교수는 고인이 된 김상진이 자결을 결행하기 전날 밤 찾아와 흉금을 털어놓았던 막역한 친구였다. 준비된 질문의 틀에 갇히는 일 없이 안 교수는 마치 어제 일을 되새기듯 청년 김상진을 회상했다.
“9남매의 유복한 집안이었지. 바둑을 좋아했고. 한 1급 수준이었을걸. 보성고 때는 반이 달라 몰랐다가 대학 때 친해졌어. 유순하고 온화한 성품이었지.” 

사건 전날 밤, 김상진은 동기 박동희(서울대 68학번)와 함께 안종건 교수가 일하고 있는 실습 계사(鷄舍)로 소주와 통조림을 사들고 찾아왔다.
“당시 충격적이었던 인혁당사건과 유신헌법, 다음날 있을 집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 상진은 이야기 끝에 가족과 애인 걱정을 했지.”
김상진은 거사 며칠 전까지도 안종건 교수와 졸업 후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당시 김상진은 선배 진위종의 농장에 가서 일을 돕거나, 아니면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안종건 교수는 별 일이 있겠나 싶었으나 사건이 벌어지고 김상진이 수원 도립병원으로 실려 간 다음에야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하공정맥(하대정맥) 절단이라는 거야.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완치를 장담했는데 수술이 끝나고 만 하루가 지나도록 수혈이 계속되더라고. 환자를 돌려 눕히고서야 피가 새고 있다는 걸 알았지.”


김상진은 결국 서울대병원으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
세인의 애도에 뒤이을 거국적 반발을 우려한 박정희 정권은 김상진의 시신을 서둘러 화장해버렸고, 곧이어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그러나 서울대생들은 고인 사망 후 40일 만인 5월 22일, 관악캠퍼스에서 시신 없는 장례식을 거행하며 경찰과 충돌한다. 학생운동사에서 속칭 ‘오둘둘 사건’으로 불리는 이 대규모 시위로 80여 명의 서울대생이 서울 남부경찰서로 연행된 가운데 김근태, 박원순을 비롯한 20여 명의 학생이 긴급 수배되었고, 56명의 학생이 구속되었다.


필자는 젊은 김상진의 꿈과 사랑에 대해 더 들어보길 원했지만 안 교수는 그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세상의 발가벗은 시선으로부터 고인이 된 친구의 인격을 지켜주려는 뜻을 더 거슬러서는 안 되리라 싶었다.
 


생명을 던져 부끄러움을 알리다.

중국인들은 의로움(義)에 대해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는 말을 쓴다. 의롭다 함은 흔히들 분노할 줄 아는 마음만을 연상하기 쉬운데 실은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일컫는다. 당시 박정희의 유신헌법에 찬성표를 던진 한국 국민은 91%를 넘었다. 총칼과 군홧발의 위용 아래 숨죽인 채 엎드려 서로의 비굴한 양심을 손가락질하며 비웃던 것이 30년 전 이 나라 백성들의 자화상인 것이다.


김상진은 자신의 생명을 내던져 쿠데타군부의 유신독재체제를 향해 항거했지만, 기실 그것은 불의에 분노할 줄 모르는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일깨운 희생이었다. 그가 죽음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간 네차예프는 과연 누구일까? 김상진 자신인가, 그의 죽음을 예견하고도 막지 못했던 서울대의 지성들인가, 쿠데타 범죄자 박정희인가, 아니면 일신의 안위를 위해 침묵한 채 엎드려 있던 한국의 국민들인가.
 

지금도 당시 유신체제에 찬성한 국민투표율을 증거로 들이대며, 30년 전 그 시절을 반사회적 인간들과 사회 불순세력 이외에는 국민 대부분이 자유롭게 주권을 행사하던 ‘자유민주주의 시대’였다고 주장하는 뻔뻔한 무리들이 특정지역의 전폭적 지지를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고 있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다.

 

꽃다운 젊음이 극단의 희생을 선택하는 안타까운 일이 계속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비분강개와 분노보다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부끄러워할 줄 아는 양심을 회복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김상진이 자결하기 전날 밤까지 탈고에 탈고를

 

 

 

거듭하며 고쳐 썼던 <양심 선언문>과 <대통령에게 보내는 글>에 수차례에 걸쳐 언급된 정의와 양심과 민주주의의 참뜻을 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
필자는 인간 김상진이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이루었을 꿈과, 사랑했을 여인과, 이사해 꾸몄을 신혼 살림방과, 낳았을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과, 세월이 흘러 서로 반백이 된 머리칼을 바라보며 나누었을 떠들썩한 동창회 술자리의 이야기들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그가 할복을 결행한 직후, 병원으로 들려가며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 학우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이랬다.
“추워.”

 

유형석
1967년 출생. 2004년 실천문학 중단편부문 신인상에 단편 「늪」으로 등단.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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