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이끈 울산노동자들의 함성1

 

  

 

울산! 과연 어떤 곳인가?

울산의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을 소개하기 전에 울산의 지리적 환경에 대해 설명을 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울산은 말 그대로 산으로 울타리가 쳐져 포근하게 가두어진 천혜의 고장이다. 구한말 삼대 개항지의 하나인 염포(동해에서 서해처럼 염전방식으로 소금을 만들었던 곳이다)가 있으며 이곳에 현대자동차가 들어서 있다. 고래로 유명한 이곳 태화강 상류 반구대 암각화에는 고래 모양의 상형문자가 있을 정도로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달천에는 철을 제련했던 곳이 발견되어 요즘 쇠부리 문화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울산은 온화한 남쪽 해양성 기후의 영향과 비옥한 토양, 풍부한 해양자원이 있어 살기에 좋았으니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처용의 모습과 표현처럼 낙천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살기 좋은 곳에 인심 나고, 웃음꽃 피기 마련인데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급격한 공업도시화로 역사 이래 이어져 내려온 더불어 사는 생활공동체의 맥이 끊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러한 지역 공동체의 맥을 이어가고자 현장에서 노조를 만들었다. 나만 혼자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 같이 잘 살기 위해서…….


2006년! 우리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현재의 상황 속에서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들은 왜, 무엇을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었는가?
회사와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일만 했던 눈칫밥 노동자들이 모여 살았던 울산에는 저임금에 하루 10시간 이상 주·야간 교대노동으로 쓰러져간 한 맺힌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1987년 이후 노동조합 설립을 통해 강철이 어떻게 단련되는지를 현장에서 배웠기에 탄압의 비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진정한 강철 노동자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첫 걸음은 1987년 7월 5일 현대엔진의 노조설립이었고, 7·8월 대투쟁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 그대로 대본과 연출 없는 대중적 분노와 조직이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분노와 희망을 담기에 노동조합이라는 그릇을 알았고, 현대계열사 노동자들이 모여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투쟁과 연대의식은 확산되었던 것이다. 노동조합은 공장의 담을 넘어 울산 노동자들의 희망의 공동체로 매일매일 커져가고 있었다. 그 누구도 그들의 역사적 진출을 막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철은 단순하며 강하다. 힘을 가하면 다양하게 변하기도 하고 비바람에 녹슬기도 한다. 이런 철의 성질을 알기에 철을 다루는 노동자들은 그처럼 닮아가고 있었다. 권위와 힘으로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탄압했지만 현장은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불만은 개인적이지만 분노는 집단적이며, 그 분노를 모으면 요구조건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요구조건을 내 걸면 상대방(사측)이 해결하려고 한다는 원리를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10여 년이 넘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그만큼 현장의 분노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중심에 있던 현대엔진에는 1980년대 초반 고적답사반이라는 소모임이 있었다. 권용묵(당시 권용묵 씨가 중심적으로 활동을 했기에 인터뷰를 하고 싶었지만 현재 그에 대한 평가가 분분하므로 추후 작업으로 넘기기로 하고 그가 활동했던 의미라도 충실히 전달하고자 한다.) 씨가 중심이 된 이 모임은 회를 거듭할수록 그 성격이 자신들이 일하는 작업장의 문제로 돌려지면서 문제의식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1980년 중반에는 노동관계 서적을 함께 읽으며 토론하고 ‘노동자는 누구인가’를 자각하게 되었다. 1985년 10월 24일, 이들은 의미있는 조직을 만든다. ‘2.4회’, 24일 결성했다 해서 이름 지어진 이 모임은 ‘우리 힘으로 현장문제를 개선하자’는 목표를 세우며 출발했다. 

 

한편 현대자동차에도 1985년 초에 작은 모임이 만들어졌다. 이상범 씨, 하인규 씨 등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갖고 있던 5명의 노동자들이 독서모임을 만들었고 회사 근처 양정교회에 모여 지역 활동가의 도움을 받아 학습과 현장문제를 토론하였다. 이들의 관심 역시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작업현장 문제로 모아졌다. 노동관계 서적을 접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노동조합을 만들 것이라는 야무진 꿈을 키우면서 동료들의 잠자는 권리의식을 깨우기 위해 유인물 작업을 전개했다. 이런 불씨들이 1987년 6·29선언이라는 정치·사회적 공간이 열려지자 계급적인 직관으로 이때임을 직시하고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조 설립

“안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노조는 안돼”라고 했지만 노동조합이라는 역사의 흐름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1987년 7월 5일 준비가 먼저 된 현대엔진 노동자 100여 명이 시내 나이트클럽에 모여 노조를 결성하였다. 1987년 7·8월 노조 설립 투쟁은 노예라는 족쇄를 풀고 당당한 노동자로 선언한 것이고 그것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노조 설립 이후 현대중공업 조합원의 요구사항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안전 재해자에 대한 목욕탕, 이발소 운영권 인계
- 안전 재해자 평생 생활대책 보장
- 출근시간 아침8시로 실시(춘하추동)
- 식사 처우 개선
- 작업 전 체조, 작업시간 인정 및 중식시간 체조를 1시에 실시
- 훈련소 출신과 공채 입사자의 임금 격차 해소
- 두발 자율화
- 3박 4일 유급휴가 소급실시
그러나 이것으로 배고픔을 면할 수 있겠는가?
전 노동자는 원한다. “임금인상 25%, 상여금차등제 폐지”를…….

각 단사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위와 같은 요구는 비슷하였다. 그러나 교섭은 만만치 않았다. 여전히 권위적인 사측에 비해 아직 경험이 없는 노조는 어영부영 보장약속을 받아왔지만 임금 등 본질적인 문제는 따내지 못 하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분노와 요구는 자연스럽게 단사차원에서 불가능한 그룹차원에서 해결할 문제로 인식하고 정주영 회장의 결단을 촉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현대그룹 노조는 8월 8일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를 결성하였고

 

 

 

 

11일, 14일, 17일 그룹과 협상을 제안하면서 정상적인 노조 운영과 회사의 운영을 기하기 위해 모든 노조는 쟁의를 중지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17일 12시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을 경우 협상거부로 간주하고 현대노동자 전체가 참여하는 실력행사를 할 것으로 발표하였다. 하지만 “나이어린 일부 과격분자들이 노조를 빌미로 개인의 영달을 위해 노조를 이용하려 한다.”라는 사측의 왜곡선전과 오판으로 결국 8월 17, 18일 대투쟁이 예고되고 있었던 것이다.


17일 중공업운동장에 모인 현대노동자들은 운동장에 모여 집회를 한다고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면서 시내 진출을 요구하였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너도나도 남목고개로, 시내로 발길을 돌렸다. 남목은 지명처럼 남쪽의 말목장이 있었던 곳으로 예전부터 중심과 변두리를 가르는 경계라는 상징성이 있는 고개였다. 이곳을 넘으면 뭔가 해결될 것 같은, 이곳을 넘으면 우리가 스스로 뭔가를 해결했다는 것처럼…….


17일 남목고개 전 남목삼거리까지 진출한 노동자들이 더 이상 시내로 가기보다는 사측에게 시간을 주겠다는 지도부의 판단을 믿고 해산을 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숙소에서는 단전, 단수, 식당까지 폐쇄가 되어 “밥을 달라”는 밥그릇 시위를 벌이기도 했으나 돌아온 것은 무자비한 전경의 폭력적인 강제해산이었다. 

이를 지켜본 많은 주민들은 노동자들이 왜 싸우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알게 되었고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에 든든한 지지자가 되기도 하였다.역사적인 대장정 18일의 대투쟁은 방어진 미포만에 동 터 올랐다
전날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모여 오늘은 결판을 낼 듯이 아예 자신이 쓰던 장비인 덤프트럭, 소방차, 지게차, 샌딩머신 등을 들고 나왔고, 그 누구도 그들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는 신념으로 되어 나타났다. 4킬로미터로 늘어선 노동자들의 대열이 “나 태어난 이 강산에 노동자되어…….” “야! 야! 야야야야! 꽃 바구니 옆에 끼고…….”

같은 노래에 맞춰 구호를 외칠 때는 실로 엄청난 파도가 되어 일어선 모습이었다. 남목고개를 넘어 시내로 향하면서 현대정공, 현대자동차 등 계열사가 붙어 대오는 더욱 늘어나고 주민들조차도 지친 시위대에게 물과 수건을 건네주는 등 이미 대세는 노조에게 유리에게 기울어 졌다. 1987년 8월 19일자 부산일보는 “이번 사태는 경제적 우위를 향유하는 사업주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유발됐고, 모든 책임은 사업주가 져야한다”고 노동자의 말을 전달하면서 약속을 지키라고 말하고 있었다.


현대자동차 노조 설립의 산증인인 이상범(49, 현대자동차노조 2대 위원장, 전 울산 북구청장)은 당시 조합원 어깨에 무등을 타고 ‘어용노조 물러가라’라고 외치며 전 공장을 순회하던 중 갑자기 마른 하늘에 장대비를 보면서 “과연 조합원들이 모일까? 하고 걱정하였으나 장대비를 맞으면서도 구름같이 몰려드는 조합원들을 보면서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며 당시의 소회를 밝혔다.


더 이상 시내로 진출하지 않고 공설운동장으로 모인 철의 노동자들은 지도부의 협상결과에 구체적인 임금인상이 없다는 이유로 강한 불만을 제기하였으나, “각 사별로 임금인상률을 일률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사업체의 경영실적에 맞춰 정당한 임금을 받자는 것이 아닙니까?” 라는 권용묵 씨의 설득에 일단 동의를 하였지만 흔쾌해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결국 또 다른 불씨가 되어 이후의 투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노동자도 인간임을 선언한 19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한 이름모를 노동자가 쓴 시를 들여다본다.

 

 

 

 

 

여린 가슴팍들은 언제나 피멍이 들어 있었다.
가위눌린 뭇사람들은 시름시름 앓고
실눈의 매서운 눈초리들은 사방 구석구석에
칼날되어 박혔다.

우리는 별을 달고자했다.
언제나 빛을 발할 수 있는 자광성을 하늘에 박아
쉼없음으로 우리를 비추게 하고자 몸부림쳤다.

구름이 많아
바람이 많아
장마와 태풍이 너무 잦아

일구팔칠 공칠공육
우리는 뜻이 있어 길을 였었다.
우린 스스로 빛을 발하는 별을 하늘에 박았다.

바람이 분다
비라도 시원스레 내리거라.
이제
우리들의 젖은 가슴에 환한 웃음을
그릴 수 있으리라. 


김호규
1988년에 울산에 내려가 현대정공에 취업하여 현재까지 노동운동을 하고 있으며 현대정공 수석부위원장을 지냈고 2002년부터 2005년까지 금속산업연맹 사무처장을 맡았다. 현재 현대자동차노동조합 교육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 황석선

 

바로잡습니다
지난 6월호 13쪽 6번 째줄 내용 중 ‘리영희 교수님’을 ‘한승헌 변호사’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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