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죽음의 공장, 죽음을 부르는 직업병 원진레이온 사건

 

 



 

원진레이온(주)은 국내 유일한 비스코스 인견사(레이온)를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설립 당시 회사명은 흥한화학(주)이었으며, 1964년에 일본 도레이레이온사의 중고 기계를 들여와 1966년 처음 가동되기 시작한 이 공장에는 노동자를 보호하려는 안전설비가 결여된 채 수많은 노동자를 이황화탄소(CS2)에 노출시켰다. 한때 호황을 누리며 흑자를 냈지만 60년대 중반 이후 합성섬유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한계 국면을 맞이하자 사업주가 두 번 바뀐 다음 76년 원진레이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인견사는 석유화학 원료인 벤젠을 기초 원료로 하는 합성섬유와 달리 펄프를 재료로 하며, 펄프에서 실을 뽑아내는 과정에서 대량의 이황화탄소 등 화공약품이 투입된다. 특히 문제가 된 이황화탄소는 2차 대전 때 독일이 신경독가스의 원료로 쓴 치명적인 유해물질로, 일시 대량 흡입 시 질식사하고, 장기간 흡입 시 뇌신경을 마비시킨다.


정부와 법정관리인이었던 한국 산업은행 측에서는 적자와 직업병 문제로 1992년 5월 매각을 통한 민영화 방안을 추진하였지만 인수 기업이 나서지 않아 1993년 5월 폐업 공고를 냄으로써 원진레이온(주)의 역사는 1962년 공장 시공 이후 31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원진레이온에서 가장 유해한 부서로 꼽히는 방사과 노동자들은 월 정규근로시간 2백 시간 외에 평균 1백 20시간씩 초과 노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원진레이온이 인체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이황화탄소와 황화수소 가스에 노동자들을 무방비 상태로 방치하고 있던 지난 86년, 노동부가 회사 측에 2만 5천 시간 무재해 기록증을 발급한 사실은 노동부의 산업재해에 대한 감시와 감독이 얼마나 겉치레에 그쳤는가를 보여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원진레이온 방사과에서 14~18년 이상 장기 근무하였던 정근복 외

 

 

4명의 노동자들은 이황화탄소 중독 증세로 퇴사하고 개별적으로 치료를 받던 중 1987년 1월 청와대와 노동부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노동부는 1987년 3월 특수검진 및 작업환경 측정 지시를 내렸고 고려대학교 환경의학연구소가 주축이 되어 4명에 대한 직업병 여부를 조사하고 방사실 환경을 측정하였다.

원진직업병의 발견
방사과에서 장기 근무했던 이들은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인해 팔다리마비와 언어장애뿐 아니라 기억력 감퇴, 정신이상, 성 불능, 콩팥기능장애 등의 증상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노동부는 88년 8월 3일 원진레이온에 대해 특별 근로감독을 실시한 결과 인체에 해로운 이황화탄소가 허용기준치(10ppm)의 2.6배, 유화수소는 허용기준치의 1.3배가 검출되었다고 밝혔다. 노동부는 또 이 업체가 전담 보건관리자를 배치하지 않고도 배치한 것으로 허위 보고했으며 유기용제인 이황화탄소, 유화수소 취급 부서 노동자에 대한 특수 건강진단을 실시하지 않는 등 9개 항목의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했다고 발표했다.


이황화탄소 중독증은 계속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던 이들은 1개월간 요양치료를 받고 산재등급에 따라 장애보상금을 받았다. 이후 이들 4명의 노동자는 병세가 악화되어 재요양신청을 냈지만 노동부는 이들이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의해 장애급여를 받았기 때문에 법적, 행정적 조치가 종결된 상태라며 재요양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갓 창간된 한겨레신문 88년 7월 22일자에는 원진레이온 공장의 이러한 유해 작업환경과 직업병 환자에 대한 사직강요 등 불법노동행위를 노동부가 눈감아 준 문제를 특종 보도함으로써 원진레이온 직업병 문제가 사회문제로 번지고 전 국민의 관심사항으로 부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중 정근복 씨는 1989년 11월 26일 서울 기독병원에서 사망, 한국 최초 이황화탄소 중독증에 의한 사망자로 기록되었다.
 

 

원가협의 결성
1988년 한국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준 ‘15세 소년 문송면 군의 수은 중독 사망 사건’의 파장으로 한국이 세계 최고의 산재왕국이라는 사실과 직업병의 심각성을 전 사회적으로 알렸다. 1988년 7월 23일 구리노동상담소의 제안으로 ‘문송면 군 수은중독사건 대책위’에서 활동했던 단체와 개인이 원진 관련 대책위를 결성, 첫 회의를 논의하였고 7월 29일에는 직업병 피해자와 가족이 참여하는 1차 대책 회의를 갖고 본격적인 공동투쟁을 결의하였다.


투쟁 속에서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한 직업병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자 가족 협의회(원가협)을 결성하고, 1988년 8월 18일 17 기구가 참여한 가운데 출범식을 가졌다.


원가협은 9월 9일 평민당 구리시 지구당사 사무실을 점거하고, 9월 14일 춘천시에서 구리시를 넘어가는 ‘88서울올림픽 성화봉송로’를 막아 온 세상에 원진직업병 참사를 알리기로 했다. 성화봉송로 점거 시 외국 언론의 보도를 염려한 노동부는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중재할 뜻을 비쳤고 이후 협상은 급진전되어 9월 14일 회사 측 대표와 원가협 및 대책위 대표가 모여 원진직업병 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합의를 했다.
오늘의 원진직업병 관리재단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는 당시에 작업환경개선과 획기적인 민사배상금 기준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결사항전의 137일 장례투쟁
1977년 원진레이온에 입사, 원액 2과에서 근무하다 83년 퇴사한 김봉환 씨는 원진직업병피해노동자협의회(원노협) 회원으로 활동하던 중 90년 10월 30일 사당의원 초진결과 이황화탄소 중독 판정을 받았다. 김봉환 씨는 발급소견서를 회사 측에 제출하고 산재요양신청을 하였지만 회사 측은 김봉환 씨가 근무했던 원액 2과가 비유해 부서라는 이유로 요양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91년 1월 5일 의정부 지방노동부사무소 보상과를 방문한 원노협 의장 이정재 씨는 회사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설명하고 노동부가 대책을 세워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의정부 지방노동부 사무소는 직권으로 특진을 약속했지만 이 날 김봉환 씨는 사망하게 된다.


1월 7일 원노협 회원들은 의정부지방노동사무소를 점거농성하고, 김봉환 씨가 이황화탄소 중독 여부를 검진 받지 못하고 사망한 데 대한 책임을 물어 사업주를 처벌하고, 노동부 측에는 부검담당 검사에게 의뢰하여 원진직업병 으로 인한 사망 여부를 판정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1월 11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을 실시하였으나 연구소 자체적으로 직업병에 의한 사인규명이 어렵다는 이유로 검사 허락 하에 신장조직을 고려대 병리학 교실에 검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고려대의 거부로 다시 서울대 병원이 맡게 되었다.
 

 

 

 
 

1월 하순 경, 부검결과 발표와 4인 판정위원회에서 사망원인을 최종 판명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회사와 사측 추천 의사들의 무성의로 4월까지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채 91년 3월 31일 사망 86일 만에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유족과 원노협 회원들은 영결식을 치르기 위해 회사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사전 배치된 경찰에 의해 봉쇄당하자 회사 정문 앞에서 시신투쟁을 벌였다.


평일에는 대책위와 조합원을 중심으로 집회를 중심으로 빈소를 지켰고 주말에는 수도권의 노동자와 사회단체, 학생들이 지지, 지원하는 연대집회가 열렸다.
 

장례투쟁이 사회적으로 부각되자 정치권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국회 노동위원회의 진상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노동부와 경찰, 회사 측은 책임회피와 사건종결만을 강요하며 대책위 간부들을 고소, 고발로 위협했고 조합원들에게는 가담하지 말 것을 종용하였다. 파업을 선언한 노조는 고 강경대 군 치사사건 정국 하에서 거리정치투쟁에 참여함으로써 투쟁의 분위기를 최고조로 올려놓았다.
연일 계속되는 언론보도와 거리정치투쟁으로 발전한 조합원들의 열기가 마침내 노동부와 회사를 굴복시켰다. 5월 21일 대대적인 투쟁의 성과 속에 회사 측의 공개 사과를 받고 타결된 것이다.


137일 간의 장례투쟁을 통해 이황화탄소에 대한 업무상 재해인정기준안이 만들어지고 퇴직직업병판정자 평균임금 산정방법의 개정을 통한 특례적용이라는 커다란 성과물을 이루어 내게 된 것이었다. 

 

 

장례투쟁의 여파는 전 사회적으로 산업재해와 직업병의 심각성을 알리고 대책수립을 촉구하는 결과를 낳았고 산재추방 전선의 폭을 확대시키는 성과를 가져왔다.

원진레이온 폐업투쟁
1993년 초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였다. 그해 3월 신 경제 100일 계획의 기획 집행을 하였던 박재윤 청와대 수석은 원진을 폐쇄하기로 결정하였다. 때를 맞춰 회사는 5월 15일 휴업을 공고하고 16일부터 휴업에 돌입하였다.


직업병대책과 고용보장쟁취를 위한 원진 비상대책위는 일방적 폐업결정에 맞서 원진 전문병원 설립과 정부 투자기관 재취업보장, 요양 중 사망자 유족보상 지급 등 요구안을 확정했으며, 상여시위, 영정시위, 소복행진, 휠체어행진, 해골가면시위, 방독마스크시위 등 다양한 형태의 집회로 산업재해 직업병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었고 산업재해, 직업병추방, 고용보장문제 등을 사회적으로 부각시켰다.


1997년 원진 전문병원 건립과 재단 추가 출연 확보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9월 18일 한국산업은행과의 첫 실무 교섭이 있었다. 원진노동자 직업병위원회는 한국산업은행과의 교섭을 통해 원진 전문병원 건립과 재단 추가출연기금 확보 방안을 제시하였으며 한국산업은행 측은 방안을 검토한 후 답변을 주겠다고 하였다.


병원건립 투쟁
10월 정기 국회를 이용 환경노동위에서 원진 관련 국정감사가 실시되었다. 국민회의 방용석 위원은 “원진 부지 매각 대금 중 일부를 원진 전문병원 건립과 향후 발견된 환자의 재해 위로금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부와 한국산업은행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산재전문병원과 재해위로금 추가출연을 요구하며 43일간 농성을 벌인 원진공대위(공동대표 구기일, 양길승)는 산업은행 측과의 5차 협상에서 은행으로부터 총 2백 6억 원을 지급 받기로 합의했다.


원진직업병 건립을 요구하며 힘겨운 싸움을 벌여온 원노위는 원진레이온 직업병 환자들의 치료와 재활을 위해 직업병 환자들의 보상금을 일부 적립해 모은 3억 원으로 원진의원을 개원(1997년 4월 8일)하였다. 하지만 이 정도의 규모로는 장기적인 전문치료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으로 1999년 6월 5일 현재의 원진 종합센터(원진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원진복지관)를 열어 원진직업병 환자들에게 보다 나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원진산업재해자협회
원진산업재해자협회(원산협)은 원진레이온 노동자 중 이황화탄소에 노출되어 국가로부터 이황화탄소 중독 환자로 판정, 산재 요양 중인 환자들의 요양관리에 관한 상담과 치료와 보상업무를 대행하고 있다. 원산협 정호태 사무국장(47)은 현재 요양 중인 환자가 825명이며 이들은 병원과 집에서 깊어만 가는 병마와 싸우며 살고 있다고 말한다.


원산협은 산재환자의 원활한 치료와 보상으로 개인의 권익을 보호하고 불이익을 방지토록 하고 있으며 계속 진행되고 있는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고통 받는 원진레이온 직업병 환자들에게 매년 1회 재검진과 치료를 받도록 하고 있다고 한다.


“원진레이온 사태는 투쟁 과정을 보듯이 직업병 인정과 검진, 폐업, 전문병원 설립 등 대책을 마련하기까지 10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이루어낸 성과물입니다. 원산협은 앞으로도 산업재해가 없는 세상이 오는 날까지 전국 산재 단체와 연대하여 산재보험제도의 모순을 개선해 나갈 것이며 산업재해자 요양 치료에 관한 상담 활동을 통해 원활한 치료와 보상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글 서 성 란
1967년 익산 출생.
1996년 중편소설 `할머니의 평화`로 실천문학 신인상 수상.
장편소설 `모두 다 사라지지 않는 달`과 소설집으로 `방에 관한 기억`등이 있다.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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