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달구벌을 유령처럼 거닐다 - 대구 `2.28학생운동`과 항쟁의 거리

달구벌을 유령처럼 거닐다 - 대구 `2.28학생운동`과 항쟁의 거리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2008년  발행한 `<그날 그들은 그곳에서>-다시 가본 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 단행본에 실렸던 글입니다. 



 

미군정의 폭정에 맞선 1946년 10월 항쟁의 진원지 대구. 그러나 그 이후 대구는 몇몇 역사적 항쟁에 동참한 걸 제외하면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불모지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군사정권이 대중적 기반을 두었기 때문일까. 게다가 대구에는 지금 또 하나의 망령이 떠돌고 있다. 박정희라는 전대미문의 독재자의 망령이 부활한 것이다. 이 망령을 불러낸 사람들은 따로 있으나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우리 모두일 것이다. 한번 불러낸 망령은 숱한 사람들의 머리 위에 그늘을 드리우며 좀처럼 물러가지 않을 테니. 그러나 이런 생각은 대구 시내를 거닐기 전의 것이다.
유령이 되어 도시를 거닐면, 도시의 과거가 보인다. 또한 미래도 보이는 법이다. 대구의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게 도와 준 사람은 대구사회연구소의 이상율 사무국장이었다.

대구 학생들의 함성

대구사회연구소는 지난 1985년 지방사회연구회로 출발하였다. 1992년에 대구사회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고 1995년에 사단법인으로 전환하였다. 스무 해 동안 지역에 뿌리를 두고 활동해 온 이 연구소에는 대구·경북지역 교수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어 학술활동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특히 지방자치·지방분권 분야에서는 국내에서 으뜸가는 연구기관으로 손꼽히고 있다.
대구시 산격동의 대구사회연구소에서 이씨를 만나 함께 대구 시내 한복판으로 향했다. 경북대 북문을 지나고 신천을 건너 대구역 지하차도를 빠져나오자, 이씨는 우리가 지나온 길이 경북대 학생들이 시위를 할 때 으레 시내로 진출하기 위해 거치는 경로라고 설명해 준다. 그 길을 걸은 기억이 났다.
지난 1995년 한총련 출범식이 경북대에서 열렸을 때였다. 당시 대구는 지하철공사장 폭발사고로 비통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따지고 보면 대구는 대형사고와 악연이 있는 셈이다. 지난해 2월 18일의 지하철 참사도 그러하지 않은가. 

지금 대구 시내는 2호선 지하철 공사 때문에 도로 곳곳에 공사장을 막고 그 위로 차가 달릴 수 있도록 한 복공판이 깔려 있다. 대구 시민들은 복공판 위를 달릴 때마다 긴장한다고 한다. 할 수 있다면 아예 복공판이 있는 도로를 우회한다고도 한다. 두 차례의 대형사고가 불러온 정신적 공황이나 다름 없다.
대구역 앞 광장은 10월항쟁과 4·19 당시만 하더라도 항쟁의 주요무대이기도 했지만, 광장이 사라진 뒤로는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광장 주변에는 섬유산업의 메카였던 도시답게 옛 섬유공장터들이 남아 있으며, 지금 그 곳에는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아이엠에프의 한파를 견디지 못한 공장들이 속속들이 문을 닫거나 이전해 갔기 때문이다. 대구의 중심은 한일극장이 있는 동성로 쪽으로 이동하였고, 자연스럽게 숱한 집회와 시위의 현장도 그 곳으로 이동하였다.
대구역에서 영남대 병원 방향으로 쭉 뻗은 길을 가다 보면 반월당이 나온다. 반월당은 6월 항쟁 당시 시민과 학생들의 주요 거점이었다. 그 곳을 지나면 명덕로와 중앙대로가 교차하는 명덕 네거리에 닿는다. 원래 명덕 로터리라 불렀으나 교차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던 2·28기념탑이 1990년 두류공원으로 옮겨간 뒤 명덕 네거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2·28 대구학생운동은 4·19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받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1960년 2월 27일 대구에서는 자유당의 대구 유세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28일에는 민주당의 유세가 예정되어 있었다. 민주당 유세에 학생들이 참여할 것을 우려한 자유당 측은 각급 학교에 일요 등교령을 내린다. 당시 대구지역 학교들이 일요일 등교 명분으로 삼은 핑계도 가지가지다. 다음 달로 예정되어 있던 시험을 갑작스레 앞당긴 곳도 있고 토끼사냥을 핑계로 삼은 곳도 있었다. 

학생들이 갑작스런 시험 일정 변경에 항의하자 “그럼 영화감상이나 할까?”라고 하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이는 일요일에 학생들을 학교에 묶어두려는 의도를 고스란히 내비친 말이었다. 자유당 측 인사가 대구를 방문할 때는 환영행사에 강제로 학생들을 동원하는 등 학교와 자유당의 부당한 행태 때문에 불만이 쌓여 있는 대구의 학생들이었다.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 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대구상고 등 대구의 학생들은 2월 28일 학교에 등교하였다가 “학생을 정치의 도구로 악용하지 말라”,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우리에게 인류애를 발휘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달려 나왔다. 이미 전날 경북고와 대구고 학생들은 반월당에서 합류할 것을 약속해 두었다. 반월당에서 합류한 학생들은 경북도청과 자유당사, 시청 앞 광장, 대구역 광장 등을 돌아다니며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 당했으며, 그 중 일부는 수성 천변에서 열리고 있는 민주당 유세에 참여하기도 했다.
2·28 학생운동은 독재정권의 타도와 같은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시작된 운동은 아니다. 허나 결과적으로 대구를 시작으로 전국의 학생들이 반독재운동에 나서게 되었으며, 이어지는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와 4·19의 도화선이 되었다. 



 독재의 근거지에서 싸운 사람들


이씨와 함께 대구시의 중심가라 할 수 있는 동성로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동성로는 대로인 한일로에 자리 잡은 한일극장 오른편에서 뻗어 내려가는 길이다. 한일극장 맞은편으로 우뚝 솟은 거대한 종합의류상가가 대구 시내를 굽어보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에는 국세청이 있었다.
동성로를 사이에 두고 한일극장 맞은편에는 옛 중앙초등학교 터가 있다. 그 자리에는 지금 2·28 기념 중앙공원이 있다. 지난해 말 문을 연 공원은 어떤 이름을 붙일 것인가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학교 이름을 딴 공원으로 할 것인지, 2·28학생운동을 기념하는 이름을 붙일 것인지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허나 결국 대구학생들의 정신을 이어받고 지금의 학생들에게 그러한 대구의 정신을 교육하는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대구시민들의 민주에 대한 열망이 만들어 낸 작지만 소중한 성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옛 중앙초등학교 교문 근처에는 마가책방이라는 사회과학서점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숱한 대구의 민주인사들이 들락거리고 세상에 눈을 뜬 청년들이 새로운 지식에 목말라하며 찾던 서점이었다. 그건 대구의 풍경만은 아니다. 서울을 비롯해 전국 대도시의 유명한 사회과학서점들은 90년대 들어 하나 둘 문을 닫았고, 그런 서점을 살리려는 운동도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벚꽃이 지고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지만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건만, 대구는 어느덧 초여름에 접어든 듯한 표정이다. 이씨는 대구에는 봄과 가을이 없다며 웃는다.

 

중심가답게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반팔 셔츠를 입은 사람도 눈에 많이 띄었고 대부분 밝고 가벼운 느낌을 주는 색깔의 옷들을 입고 있었다. 한일극장 주변과 그 뒤편 대구백화점 앞은 대구 시민들의 만남의 장소다. 또한 대구백화점 앞은 각종 캠페인과 촛불시위 등이 하루도 끊이지 않고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탄핵된 뒤 탄핵무효 촛불시위도 밤마다 그 곳에서 열렸다.

이씨와 함께 대구백화점 앞에 도착했을 때에도 대구 여성회에서 주최하는 여성유권자 투표독려 문화행사가 한창 준비 중이었다. 조금 뒤 행사 준비가 끝나자 노래패와 율동패가 어우러져 흥겨운 문화마당이 펼쳐졌다. 시민들은 지나치던 발걸음을 잠시 멈춰 구경을 하기도 하고 아예 돌의자에 눌러앉아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기도 한다. 햇살이 강렬하다는 걸 빼곤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이 활기찬 풍경이었다. 고통과 절망처럼 어두운 낱말들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대구는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고달픈 여정을 걸어왔다.
해방 정국에서만 하더라도 대구의 별명은 ‘야당도시’였다. 10월 항쟁을 비롯해 2·28 대구학생운동을 보더라도 대구 시민들의 민주에 대한 열망은 다른 도시 못지않게 뜨거웠다. 마치 무더운 기후를 견디는 사람들답게 억세고 기운도 셌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들어 선 뒤로 대구에는 관제데모만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화운동이란 찬밥 신세가 아닐 수 없었다.
해방 정국에서만 하더라도 대구의 별명은 ‘야당도시’였다. 10월 항쟁을 비롯해 2·28 대구학생운동을 보더라도 대구 시민들의 민주에 대한 열망은 다른 도시 못지않게 뜨거웠다. 마치 무더운 기후를 견디는 사람들답게 억세고 기운도 셌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들어 선 뒤로 대구에는 관제데모만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화운동이란 찬밥 신세가 아닐 수 없었다. 

한일극장을 기준으로 동성로와 반대편에 있는 중앙로를 건너면, 아직도 이런 곳이 있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재래시장을 만날 수 있다. 염매시장이라 불리는 시장의 골목을 지나 끝에서 왼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일명 곡주사(哭呪士)라 알려진 성주식당을 찾을 수 있다. 이곳이 곡주사라 불리게 된 이유는 이 술집을 찾는 사람들이 “유신을 저주하는 선비들이 모인 곳”이라 자처했기 때문이다.
유신체제 말기에 대구지역 대학생들도 단일한 조직을 만들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계명대, 영남대, 경북대 학생들이 연합하여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경북학생협의회’라는 단체를 조직한다. 1979년 9월 4일 계명대 학생들은 빌라도광장에서, 영남대 학생들은 도서관 앞에서, 경북대 학생들은 시계탑 주변에서 일제히 이 단체의 설립을 선포하고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유신헌법 철폐 등을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하였으며 이로 인해 경북대, 영남대가 휴교에 들어가고 계명대는 10월 24일 2천여 명의 학생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시킨다.


시내 전체가 민주화운동의 성역


곡주사는 마치 대구의 민주화운동과 궤적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곡주사로 통하는 좁은 골목 옆으로는 수십 층이 넘는 삼성금융플라자 빌딩이 서 있다. 그 탓에 곡주사는 늘 어둑신하다. 도시의 변두리도 아닌 중심가에 이처럼 그늘진 곳이 있다는 건, 마치 대구에서 민주화운동이 늘 그늘 아래 있었던 것을 연상시킨다. 그래서일까. 여느 술집과 다르게 그 곳에는 울분과 분노, 상처와 아픔이 짙게 배어 있는 듯 했다. 

70년대 후반 처음 문을 연 뒤로 유신시절의 대학생들, 대구지역 민주인사들과 함께 살다시피 한 곡주사의 정옥순(71) 할머니는 이왕 온 김에 들고 가라며 찌짐과 막걸리를 내주었다. 대구의 대학생들이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경북학생협의회’의 결성을 모의한 장소 역시 바로 이 곳 곡주사였다. 
80년대와 90년대에는 근처의 반월당에서 집회를 마친 사람들이, 요즘 들어서는 대구백화점 앞에서 촛불시위를 마친 사람들이 꼭 빼먹지 않고 들르는 곳이다. 

대구 사람들이 찌짐이라 부르는 파전에 텁텁한 막걸리를 걸치고 나오니 해가 설핏 기우는 듯 하다. 염매시장 근처에는 씨네 아시아가 있다. 그 곳은 원래 아세아극장이었는데, 직선제 개헌추진대회가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극장에서 그런 대회가 열렸다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그러고 보니 대구 시내 전체가 민주화운동의 성역쯤으로 여겨졌다. 곡주사를 중심으로 보면 바로 옆의 중앙로를 비롯해, 반월당 그리고 명덕 네거리 또한 한일로와 동성로 모두가 몇 걸음 안에 있다. 대구 시민들이 민주화를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내딛던 거리가 바로 대구의 중심가 그 곳에 있었다. 

술기운 탓이려나.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 유신시절 자신의 집을 찾던 학생들이 보약을 만들어 가지고 지금도 찾아온다며 헐겁게 웃던 곡주사의 할머니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여전히 이 도시의 한 귀퉁이에 찌짐과 막걸리를 파는 술집이 있는 한, 무언가를 비판하고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양심들이 찾아들 그늘은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대구의 거리가 지워지며 과거의 풍경들이 한꺼번에 솟아났다. 
4·19를 거쳐, 군정연장 반대 시위의 물결이 지나갔고, 그 뒤를 따라 유신반대 시위의 물결이, 6월 항쟁의 함성이, 노태우정권 퇴진 국민대회의 깃발이 차례차례 지나갔다. 이제서 조금 알 것도 같다. 대구가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게 여겨졌던 건, 어느 때건 대구 시민들 역시 민주화의 길에 동참하리라는 믿음과 증거가 구석구석에 숨 쉬고 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오래 된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유령처럼 달구벌을 거닐어 보고서야 그 곳을 조금 알 수 있게 된 듯한 기분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동학교주 최제우가 처형당한 자리라는 중앙공원 위쪽으로 석양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글 손 홍 규
1975년 전북 정읍 출생
2001년 최명희 청년 문학상 소설 수상
<작가세계>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바람 속에 눕다>, <사람의 신화>, <폭우로 걸어 들어가다>
<아이는 가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다> 등 발표

 

사진 황석선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