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벌써 14년이 흘렀다. 미선 효순 추모비

벌써 14년이 흘렀다. 미선 효순 추모비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한 해가 지나가면 보통 ‘다사다난 했던 한 해’라는 표현을 그야말로 상투적으로 사용하지만 2002년만큼 이 표현이 어울렸던 해도 없을 듯 싶다. 2002년이라면 누구나 월드컵을 생각할 테고, 첫 국민경선을 통해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해이기도 하다. 2차 연평해전이나 이명박을 서울시장으로 만든 지방선거, 부산 아시안게임 같은 꽤 굵직한 사건들도 이 둘에 비하면 빛이 바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사다난’ 했던 2002년에 선정된 ‘올해의 인물’은 놀랍게도 평범한 학원 강사였던 김기보 씨였다. 그가 선정된 이유는 바로 그 해 6월 13일 미군 장갑차에 치어 숨진 열 다섯 살의 두 소녀 심미선과 신효순을 추모하기 위해 그리고 미군의 폭력을 꺼버리기 위해 촛불을 들자고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약속의 날’인 2002년 11월 30일 1만 명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 앞으로 나왔고 주말을 거듭할수록 숫자는 급격히 늘어났다.  

 2002년 여중생 사망 49제 집회

 

12월 7일에는 5만 명, 12월 14일에는 최대 인파인 10만 명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섰다. 그러다 보니 2002년 겨울에 광화문 일대 상점 중엔 양초를 팔지 않는 곳이 드물었다. 노점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2002년 촛불집회 



이 촛불로 인해 지금도 미선, 효순 사건은 국민들의 기억에 남아있지만 두 소녀가 참극을 당한 장소가 어디인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참사가 일어난지 거의 반 년이 지나서야 그런 ‘이슈’가 되었는지를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뜨겁던 6월 13일, 그 날은 지방선거일 이었고, 따라서 학교도 문을 닫았다. 친구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좁은 지방도를 걷던 두 여중생은 주한미군의 장갑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러 갔다가 목숨을 잃는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장소는 둘이 나고 자란 동네인 경기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56번 지방도로였다. 도로 폭은 3.3m에 불과했는데, 장갑차의 폭은 3.67m였다. 미군이 그 좁은 도로로 이동한 것부터 잘못이었다. 그 길에는 인도가 없는데 지금도 그러하다. 마을 사람들은 늘 아슬아슬하게 갓길로 다녔고 물론 그날 두 여중생들도 그랬다.

사고 5개월 뒤인 11월, 동두천시 미2사단 캠프 케이시 군사법정에서 열린 재판에서 운전병 마크 워커 병장과 관제병 페르난도 니노 병장은 무죄 평결을 받았다. 참았던 시민들의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온 시민들은 “이 땅에서 벌이진 일, 이 땅의 법으로 해결하자.”,“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외쳤다.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부당함을 우리 국민이 널리 알게 된 계기도 이 사건이었다. 22조 3항이 대표적인 독소조항이다. 주한미군이 공무 중 저지른 범죄에 대해선 우리 정부가 미국에 재판권 포기 요청을 해도 미국이 거부하면 그만이었다. 반면 미국이 한국에 재판권 포기를 요청하면 ‘특히 중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재판권을 포기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 사건의 충격파가 커지자, 우리 정부는 사상 처음으로 미국에 재판권 포기 요청을 했지만, 그들은 거부했다. 이런 비상식과 불합리한 한미 관계가 수 만 명의 시민을 거리로 끌어냈던 것이다. 지금도 이 불평등한 협정은 바뀌고 있지 않다. 하지만 미군을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미군은 사고 석 달 후인 9월 21일, 현장을 내려보는 작은 언덕에 추모비를 세웠다. 그런데 현장에 가보니 내용이 맹랑한데, 특히 우리말로 번역된 추모사의 마지막 줄은 어이를 ‘상실 하게’ 만든다. 영어 원문은 “We dedicate this memorial as a lasting symbol of our respect” 인데, 이를 “용서와 추모의 뜻을 모아 이 추모비를 세우고 추모사를 바칩니다.”라고 ‘번역’해서 새겨 놓았다. 가장 문제가 되는 단어는 ‘용서’다.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 지도 명확하지 않지만 무엇보다 정작 영어 원문에는 그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런 번역을 누가 한 것일까?

추모비를 바친 ‘미 2사단 일동’ 이란 글자 중 ‘미 2사단’이라는 글자는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 그가 진짜 손을 데야 할 단어는 바로 ‘용서’라는 단어가 아닐까? 14년이 지난 지금은 혹 모르겠지만 겨우 석 달이 지난 당시, 유가족들이 판결이 나기도 전에 ‘미리 용서’했을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군 스스로도 ‘용서’란 단어를 쓰지 않았는데 말이다.

다만 추모비 뒷면에 새겨진 추모시 <아! 복숭아가 졌구나>를 읽어보니 어느 정도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두 희생자가 졸업한 효촌 초등학교의 교장이 쓴 시인데 마지막이 이러하다.

가슴이 아파 말을 못하겠구나.

그러나 얘들아 모두 용서하고 홀연히 떠나거라
아픔 없는 나라,
슬픔 없는 하늘나라에서
고이 잠들 거라.
이 곳에서 일일랑 잊어버리고
편히 쉬거라.

본인 스스로 “가슴이 아파 말을 못하겠구나”라면서 바로 다음에 주제넘게 용서를 운운하는지 기가 막힐 따름이다. 이렇게 황당한 추모사 번역과 추모시가 또 있을 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울렛들이 들어선 가리봉오거리에는 수출기업을 찬양하는 조형물은 있어도 산재로 희생된 노동자들을 기리는 기념비는 보라매 공원에 쳐 박혀 있고, 성수대교 희생자 위령비도 도로 한 가운데 도보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곳에 세워져 있다. 해방 이후 최대 참사였던 삼풍백화점 참사 위령비도 엉뚱하게 양재 시민의 숲에 서있고, 정작 그 터에는 으리으리한 주상복합이 들어서 있다.

참사나 비극을 되풀이 하지 말자는 다짐은 그냥 입에 올리는 말이고, ‘칙칙한 사건’의 흔적은 ‘영혼 없는’ 추모시와 추모사를 새겨 눈에 띄지 않는 곳이나 그 놈의 땅 값 때문에 시비를 걸지 않는 공공용지에 쳐 박아 버리는 것이 우리의 ‘추모 문화’의 민낯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런 추모비 대신 시민사회 단체에서 새로운 추모비를 제작했지만 세우지 못하고 모처에 보관되어 있다. 이 추모비가 현장에 세워질 날이 빠를까?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이 개정되는 날이 빠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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