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5.18 민중항쟁의 첫 희생자 이세종 열사의 추모비를 찾다.

5.18 민중항쟁의 첫 희생자 이세종 열사의 추모비를 찾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1980년 5월 18일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도청에서 희생된 윤상원 열사나 단식투쟁 끝에 산화한 박관현 열사도 5.18 항쟁보다는 덜 하지만 그래도 꽤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첫 희생자인 이세종 열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놀랍게도 열사가 산화한 장소는 광주가 아닌 전주였다.  


운명의 날 하루 전인 1980년 5월 17일, 21세의 이세종 열사는 전북대학교 농학과(현 농업생명대학 작물생산 전공) 2학년이었다. 농대 계열에도 열사가 많이 나왔는데 5년 전 먼저 간 김상진 열사는 선배가 되고 6년 후 산화한 이동수 열사는 후배가 되는 셈이다. 열사는 호남대학총연합회의 연락책임자를 스스로 맡아 전북대학교 학생회관에서 다음 날 집회에 나눠줄 유인물 등사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려던 때가 막 18일 자정 무렵 이었다, 한 선배는 "유인물을 담당했던 세종이는 굉장히 성실하고 착했다"고 회고했다. 이 열사는 그 날 밤의 불침번도 맡고 있었다. 역사를 보면 안타깝게도 대개 이런 인물들이 먼저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많은 데 그 날 역시 그러했다. 

18일 0시를 기해, 그 동안 제외되었던 제주도까지 포함한 전국 비상계엄령이 내려지고, 전두환을 수괴로 한 신군부 세력이 치밀하게 계획한 정권 탈취가 시작되었다. 자정이 지나자마자 계엄군이 착검한 M16 소총과 긴 곤봉을 들고 전북대로 들이닥쳤다. 물론 그들의 우선적인 목표는 총학생회의 간부들이었다. 총학 선배들은 학생회관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불침번 이었던 이 열사는 방을 뛰어다니며 학우들을 깨웠다. 이런 그의 행동은 군인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옥상으로 달아났지만 결국 무차별적 집단구타와 그로 인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무자비하게 학생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광주가 주요 목표물이었지만 전주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 시간 후, 학생회관 옆 광장에서 온 몸이 멍들고 피투성이가 된 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됐다. ‘물론’ 경찰과 정부는 단순 추락사로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부검의였던 이동근 박사는 9년이 지난 1989년, 유족들이 요청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신청용 의견서’에서 “이 군의 두개골은 광범위한 복합골절 양상을 보였고 안면부, 흉부, 복부, 사지 등에 많은 타박상이 존재했다. 손상 가운데 상당 부분은 추락 이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고 증언했다. 이 같은 내용은 이 열사의 사인이 단순한 추락사가 아니며 옥상에서 떨어지기 전 이미 군인들에 의해 무차별 폭행당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망 직후 열사의 시신은 생가인 김제군 월촌면 연정리에 있는 집안의 묘역에 안치되었다. 의로운 죽음을 기리기 위한 그의 추모비가 학생회관 옆에 세워진 시기는 1985년의 5월 18일이었지만, 당국의 탄압으로 두 달 만에 할 수 없이 고향으로 옮겨졌다가 1989년에 지금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2003년에는 추모비를 받치는 대가 세워졌고,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는 가슴 아프게 만드는 비문이 새겨졌다. 이 비문을 생각한 사람은 같은 날 학생회관에 함께 있었던 학우 김성숙 선생이 지었다. 자기가 이세종이라면 어떤 마음 이었을까를 생각하며 지은 글이라고 한다. 열사의 죽음이 자신들을 지키려다 일어난 비극이기에 같이 있었던 학우들은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고 매 해 5월 17일이면 어김없이 추모비를 찾아온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부근의 공터에 ‘이세종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비문의 글씨는 올해 초, 세상을 떠난 신영복 선생의 작품이다. 올해 초 세상을 떠난 선생은 자신이 쓴 글씨를 새긴 장소들을 직접 찾아 그 글씨에 대한 이야기를 묶어 2012년에 <변방을 찾아서>라는 작은 책을 냈다. 추모비 바로 옆 학생회관에는 전북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을 상징하는 거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열사가 모교의 명예졸업장을 받기 까지 15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열사의 출신고인 전라고등학교에도 2002년 5월 17일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하지만 이 열사는 광주에서 숨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1994년에는 신청이 기각되는 등 희생자로 인정받기 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1998년 10월에야 광주민주화관련 보상심의회의 결정으로 명예가 회복되었다. 그 이듬해 4월, 열사의 시신은 비로소 5.18묘역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정확한 사인과 그를 죽은 자들이 누구인지는 3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최고책임자는 누가 보아도 ‘아직도 살아있는 자’ 전두환 이다. 그 자가 올 해 ’자서전‘을 낸다고 한다. 아직 발간된 것은 아니지만 발포명령을 내리진 않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 자답게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행동이지만 그들은 총을 쏘기 전에도 곤봉과 개머리판, 주먹과 군화발로도 얼마든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실 5월 18일 광주에서도 총을 쏘기 전 그렇게 시작했다. 광주 5.18항쟁의 첫 희생자는 전주의 이세종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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