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한국 민주화 운동사의 증인이자 주역. 영원한 인권 변호사 이돈명

한국 민주화 운동사의 증인이자 주역. 영원한 인권 변호사 이돈명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동아일보 광고 탄압, 김지하 반공법 위반 사건, 3.1민주구국선언, 청계피복노조 사건, 고려대에 떨어진 긴급조치 7호, 리영희와 백낙청의 반공법 위반사건, 동일방직 사건, 동아일보 자유언론수호 투쟁위원회 사건,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 오원춘 사건, 통혁당 재건위 사건, 유신의 조종을 울린 YH 사건, 10.26, 학림사건, 미 문화원 방화 사건, 서울대 프락치 사건, 대우자동차 파업, 미문화원 점거농성, 권인숙 성고문 사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이 사건을 묶으면 1970년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사의 전부라고 해고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이 사건들은 5년 전인 2011년 1월 11일에 세상을 떠난 이돈명 변호사가 관여했던 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70,80년 대에 일어난 민주화 운동 사건 중 그가 참가하지 않은 사건을 찾는 쪽이 훨씬 빠르다는 의미이다.  


이돈명 변호사는 1922년, 삼봉 정도전의 유배지이기도 했던 전라남도 나주 다시면에서 태어나, 1946년에 한국 최초의 민립대학인 조선대학교의 전신 광주야간대학원에 입학하고 재학 중인 1948년에 조선변호사 예비시험에 합격했다. 1950년에는 정식 대학이 된 조선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52년 제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여 판사로 활동했다. 5.16쿠데타 이후 법관직에 회의를 느끼던 차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1963년부터 법복을 벗고 다른 세 변호사와 함께 제일합동법률사무소를 열고 민사사건 전문 변호사로 일했다. 공교롭게도 사무실이 입주했던 서울시청 옆의 건물은 헐렸지만 새로 지어진 건물에는 지금 인권위원회가 들어섰다.
1974년, 동아일보 광고 사태에 이어서 일어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민청학련 사건)에 충격을 받고 이 사건을 맡은 황인철, 홍성우 변호사에게 찾아가 변론에 동참하겠다고 요청하면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의 나이는 53세, 일반적으로 이 나이가 되면 보수적이 되기 십상인데 그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 해 12월 23일, 세종로 성당에서 토마스 모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는다. 이렇게 그의 일생 중 빼놓을 수 없는 천주교와의 인연이 정식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18년 후 천주교 평신도로써 최고의 자리 중 하나인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초대 회장를 맡게 된다. 그의 유택도 남양주 별내에 있는 세종로성당 영복산묘원에 있다. <유토피아>의 저자이자 대법관이었던 한 토마스 모어는 헨리8세의 폭거에 맞서 양심을 지키다가 목이 달아난 법률가의 수호성인으로서 그에게 꼭 맞는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변호사는 죽기 직전에도 망나니에게 “내 수염은 죄가 없으니 살 살 다뤄주게나”라고 농담을 했던 수호성인처럼 농담과 흥을 좋아했다. 


인권 변호사로서 처음 법정에 선 때는 1975년 시인 김지하의 반공법위반 사건이었다. 70, 80년대를 그야말로 치열하게 보낸 이돈명 변호사에게 수많은 일화가 따라 붙지만 그 중 하나가 서울대 프락치 사건 때 변호를 맡았던 유시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글 <항소이유서>를 읽어 본 이 변호사는 혼자 읽기 아깝다고 글의 복사본을 유시민의 누이 유시춘에게 넘겼고 을지로 뒷골목 인쇄소에서 복사된 이 글이 <동아일보>에 보도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던 것이다. 그는 1985년에 최초의 인권변호사 모임인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를 조직했다. 최연장자였던 그는 고문을 맡았는데, 이 모임은 강신옥, 고영구, 한승헌, 조준희, 홍성우, 조영래, 최병모, 박인제, 이상수, 하경철 등 28명으로 구성되었다. 

변호만 맡던 그는 1986년에 드디어 피고가 되어 ‘빵’살이를 하게 된다. 사연은 이러하다. 인천 5.3항쟁 주동자로 수배된 이부영이 고영구 변호사 집에 숨어 살게 되었는데, 노모가 계시고 부인도 신경성 위경련을 앓고 있던 터라 이부영이 잡히게 되면 이 변호사가 숨겨준 것으로 하기로 했다. 65세였던 이돈명은 그렇게 되더라도 노인인 자신을 구속까지 시키겠냐 싶었지만 10월 말에 구속되어 8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 사이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희생되면서 87년 6월 항쟁의 막이 오르게 된다. 다행히 5월에 석방된 이돈명은 6월 항쟁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3년 후 정법회는 젊은 변호사들이 결성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과 결합하여 한국의 민주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후보 단일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하여 실의에 차 있던 그는 생각하지도 못한 제의를 받았다. 민립대학으로 시작했지만 박철웅이 사유화하여 온 갖 비리가 저질리진 모교 조선대학교의 총장직 제안이었다. 원하지 않은 자리였기에 그는 최대한 피하려 했지만 할 수 없이 맡게 되어 1988년부터 4년간 조선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며 학내 개혁을 이끌었다. 물론 평탄할리 없는 시간이었다. 박철웅 일파와 군부 독재 세력에 의한 학원운영과 관련하여 1989년 12월 두 번째로 피고인이 되어 불구속 기속되기에 이르지만 4년 후 무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 반대로 과격한 학생들과의 충돌로 적지 않은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했다. 

일흔이 넘었지만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은 여전히 많았다. 친일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1995~1996) 직을 맡았고. 그를 인권 변호사의 길로 이끈 인혁당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1988년), 민족화해협력 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2001~2003)에 이어 조선대에서의 경험을 살려 문제 사학이었던 상지대학교의 관선이사장(2002)을 맡고 민주항쟁 계승사업회 공동대표(2003) 등을 역임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 정부 시절에는 호남 배려 차원인지 국무총리 후보로 여러 번 물망에 오르기도 했지만 결국 실현되지는 않았다. 오십대 중반에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그가 종교, 언론, 통일, 민족 문제, 사학 개혁 등 손을 대지 않은 분야는 이렇듯이 거의 없을 정도다. 

2011년 그가 간후, 천주교인권위원회는 그를 추모하고 인권의 가치에 대한 고인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이돈명 인권상‘을 제정했다. 이돈명 인권상 1회는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 서울본부’, 2회는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3회는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 지난해 4회는 ‘무지개 농성단’이 수상했고, 올해의 수상자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가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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