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300년 항쟁의 섬에서 인동초가 피어나다 : 김대중을 낳은 땅 하의도

300년 항쟁의 섬에서 인동초가 피어나다 : 김대중을 낳은 땅 하의도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한국 현대사에는 ‘30년 주기설’이란 것이 있다. 1919년에는 봉건왕조를 상징하는 고종황제가 붕어했고, 1949년에는 독립운동의 상징인 김구 선생이, 1979년에는 독재와 산업화의 상징인 박정희가 세상을 떴다. 그리고 2009년에는 한국 현대사와 민주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 명의 거인 김수환 추기경과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이 약속이나 한 듯 나란히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몇 달 사이에 자신의 후견인인 김수환 추기경과 ‘몸의 반쪽’ 노무현 대통령을 떠나보내고 자신도 8월 18일 세상을 뜬 김대중 대통령은 1924년 1월 6일, 전라남도 무안군(지금은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태어났다. 목포에서 34km 떨어진 하의도는 연화부수(蓮花浮水) 즉 물 위에 연꽃이 떠있는 모습이라 하여 연꽃의 다른 말인 ‘하의 荷衣’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지만 단순히 발음이 바뀌어서 그렇게 되었다고도 한다.

 

하의도의 관문인 웅곡포구에 들어서면 어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깃배가 거의 눈에 띄지 않고 넓은 들판이 보인다. 하의도 마을들은 대부분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고 섬 전체가 논밭으로 가득 차 있어 섬같지 않아 보인다. 김대중 대통령의 아호인 후광後廣은 고향 마을의 이름으로 말 그대로 ‘뒤가 넓다’ 란 의미인데, 실제로 갯벌을 메운 간척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하의도 사람들은 옛부터 농사와 염전이 주업이었는데 피와 눈물이 맺힌 3백년에 걸친 통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려 말부터 왜구들의 침략이 극심해지자 조선에서는 명나라를 본받아 공도(空島)정책을 실시했고 대부분의 섬들은 무인도가 되었다. 섬과 바다를 포기했던 조선 왕조가 임진왜란 이후 섬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다시 주민 거주를 허락했는데, 섬에 들어간 사람들은 황무지를 개척하고 갯벌을 간척해 후광리처럼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만들었다. 이런 땅은 개간한 사람의 소유권을 인정해주었다. 하지만 1623년, 인조는 하의도의 개간된 땅을 요즘 드라마 <화정>으로 유명해진 정명공주에게 하사하여 강탈하고 말았다. 그녀는 홍 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데, 그래도 인조는 4대 손까지만 세미(稅米)를 받도록 조건을 달았다. 하지만 정명공주의 4대 손이 사망한 이후에도 그들은 하의도 주민들에게 땅을 돌려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홍씨 가문은 하의도 주민들이 나중에 새로 개간한 땅마저 빼앗았다. 

결국 주민들은 조정과 홍씨 집안 양쪽에 이중으로 세금을 바쳐야 했다. 수탈이 극에 달하니 저항은 거셀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은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대를 이어 무려 3백여 년을 싸웠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농민항쟁이었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비인 저자 혜경궁 홍의 아버지인 홍봉한으로 이어지는 권세가인 홍씨 가문에 번번이 패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시기 하의도 땅은 일본인들에게로 넘어갔다. 주민들은 도세 납부 거부와 각종 소송, 농민조합운동 등 끊임없이 저항하고 투쟁했다. 결국 해방 후 국회의 유상반환 결정을 얻어내면서 1956년에 이르러서야 농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무려 330여 년에 걸친 투쟁의 승리였다. 하의도 농민운동의 역사는 국내 유일의 농민항쟁 기념관인 하의도 토지항쟁기념관이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런 땅에서 태어나서인지 김대중은 5.16 직후 힘들게 당선된 의원직을 빼앗기기도 하고 목숨도 여러 번 잃을 뻔 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생가는 남아있던 터와 구조물을 그대로 이용하여 대지 746평에 6칸짜리 집으로 60여년 만에 원형대로 복원하였으며, 등신대보다 약간 작은 느낌의 동상이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하의도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시기는 공교롭게도 서거해인 2009년 4월24일 이었다. 수구초심이라는 말대로 마지막을 예감했을 지도 모른다. 바로 그 날 하의도 토지항쟁기념관이 개관했다. 선산도 찾았고 자신도 1년 이상 한문을 배웟던 초암 김연 선생의 덕봉서원도 방문했다. 그 날 따라 보슬비가 내려 비서들이 만류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큰 바위 얼굴 등 섬 곳곳을 누볐다. 

여기서 그는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고, 6년 반의 감옥살이를 했으며, 20여 년간 연금과 감시 속에서 살았고, 3년 반의 망명생활도 했지만 하의도 농민의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투쟁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고, 방관도 악의 편이다. 다시 민주주의에 위기가 왔다. 방관하지 말고 민주주의를 지켜나가자"고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그의 말은 결국 유언이 되고 말았다. 한 달 후,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고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이라고 극심한 상실감을 토로하고 오열했던 김대중 대통령도 8월 18일에 뒤를 따랐다. 


 

하의도 후광리 생가는 워낙 외진 탓인지 조용하다. 추모각에 들려서 향을 피우고 절도 올렸다. 절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생전의 그를 만난 적도 없고 그를 존경하기는 했지만 미워도 했었다.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쓸쓸함과 묘한 슬픔은 무엇일까? 그는 결국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의 정치는 결코 성공했다고만은 볼 수 없다. 무엇보다 그의 노력과 용서에도 불구하고 독재 정권 하에서 인권을 억압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데 앞장선 이들의 진심어린 반성이나 사과도 받아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역사가 되버린 그는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역사는 우리에게 진실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시간 앞에 무릎을 꿇는다. 시간이 지나면 역사의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의도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돌아와 목포역 광장에 들렀다.  이곳은 《김대중 자서전》 에서 ‘목포의 전쟁’이라고 표현했던 1967년 6월, 7대 국회의원 선거의 ‘주전장’이다. 당시 박정희는 눈에 가시 같았던 야당 대변인 김대중을 꺾기 위해 육군 소장과 장관을 지낸 김병삼을 목포에 공천했고, 엄청난 돈을 쓰고 관권을 투입하였을 뿐 아니라 본인이 두 번이나 목표역 광장에서 지원 연설까지 하였다. 당시 김대중 후보의 사무실은 목포역 앞의 2층짜리 일본식 건물이었는데, 목표역 광장에서 한 김대중의 연설은 거의 전설이 되었다. 물론 그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선거 결과는 6천여 표 차이의 승리였다. 결국 이 승리로 그는 4년 후,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한국 현대정치사에 길이 남을 선거전을 치렀다.

그러고 보면 30년 주기로 간 인물들 중 김수환 추기경을 제외하면 ‘제 명’을 다하신 이는 없는 듯하다. 고종 황제는 독살설이 유력하고, 김구 선생과 박정희는 피살당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사실 김대중 대통령도 그 죽음에 충격을 받아 수명이 단축된 셈이다. 우리 현대사가 얼마나 파란만장했는지를 증명하듯이 말이다. ‘목포의 눈물’은 결코 목포의 ‘눈물’ 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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