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

 남영동 대공분실


글 권기봉/ warmwalk@gmail.com

 

대검찰청이 지난 2008년 창설 60주년을 맞아 검사와 검찰 직원 3천9백여 명을 대상으로 사회적으로 중요했던 검찰 수사에 대한 설문조사를 통해 ‘20대 사건’을 선정 발표한 적이 있다. 그 중 1위로 뽑힌 사건은 다름 아닌 ‘박종철 고문 치사 및 축소 은폐 사건’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바로 그 사건이다.

사단이 벌어진 것은 1987년 1월 중순이었다. 자정 무렵 서울 신림동에 있던 하숙집으로 돌아가던 한 청년이 치안본부 대공 수사관들에 의해 영장도 없이 연행되었다. 청년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이었다.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관련 주요 수배자였던 그의 학교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한 참고인 자격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정오쯤 경찰의 부탁을 받은 중앙대학병원 내과의 오연상 교수가 조사실로 달려왔을 때 박종철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경찰은 수사에 대한 자기 압박에 의한 쇼크사라고 주장했다. 심문 과정에서 ‘탁’ 하고 책상을 치니 박종철이 갑자기 ‘억’ 하고 쓰러지며 사망했다는 것이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렀던 시절이었기에 한 대학생의 사망 사건도 잠잠하게 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고문 치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마침 감옥에 있던 이부영 전 의원이 교도관으로부터 소문을 듣고 밖에 알린 것이었다. 경찰은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를 인정하며 수사관 2인을 구속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구나 알 듯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폭로로 고문에 가담한 수사관이 모두 5명이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짐에 따라 경찰과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윽고 넥타이부대까지 거리에 나서면서 한국 사회는 6월 항쟁의 본격적인 닻을 올리게 되었다.

박종철 고문 치사 및 축소 은폐 사건의 주요 현장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곳은 서울 남영역에서 멀지 않은 도심 골목 속에 조용하게 자리하고 있다. 2005년 경찰이 창설 60주년을 맞아 과거를 비판적으로 돌아봄과 동시에 인권의 보루로 만든다며 경찰청 인권센터를 입주시킨 이곳에는 애당초 직원 50여 명이 일하는 경찰청 보안3과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 1976년 대간첩 수사업무를 위해 세웠다지만, 실상은 ‘남산’이라 칭했던 안기부와 ‘서빙고호텔’로 불린 보안사령부 대공분실 등과 함께 간첩을 잡는 것보다 만들어내는데 더 능숙했던 곳이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쥐색 벽돌로 지은 지상 7층짜리 본관과 부속 건물은 이미 30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상당히 세련된 느낌을 준다. 단순하면서도 간결한 선(線). 창틀을 벽체에서 약간씩 튀어 나오게 함으로써 질서정연한 대오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5층 전체와 3층 일부에는 좁은 창문을 사용함으로써 변화를 노리는 디자인, 그리고 정문에서 90도 돌려서 배치한 현관은 당시 세워진 다른 관공서들에 비해 어딘가 세련된 느낌을 준다. 이곳에서 행해진 무수한 고문의 기억들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더 의아하기만 한 외관이다. 

 

이 건물의 역할과 특징을 오롯이 느끼려면 현관이 아니라 건물 뒤를 통해 들어가는 것이 낫다. 건물 뒤쪽에 있는 듯 없는 듯 자리잡은 쪽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반지름이 채 1미터도 안 되는 나선형 계단을 만나는데, 바로 그곳이 입구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에 따르면 “피조사자들 머리에 두건을 씌운 채 끌고 온 뒤 바로 이 나선형 계단을 통해 조사실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한 데에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고 말한다.

“피조사자들 머리에 두건을 씌웠기 때문에 어디로 끌려온 건지 당연히 모르는데다 이렇게 변변한 창문도 없는 계단을 나선형으로 빙빙 돌면서 올라가면 아예 방향 감각을 잃게 됩니다. 이곳과 밖을 철저하게 구분 짓는 세탁 장치로 볼 수 있는데요, 그렇다 보니 자신이 몇 층에서 조사를 받았는지 기억들을 못해요. 7층이 가장 높은 층인 데도 8층이나 9층에서 조사받은 것 같다는 사람들까지 있던 것을 보면......”

조사실이 몰려 있는 5층 내부 구조는 더 지능적이다. 예컨대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509호실의 철문은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지만 반대로는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불을 켜고 끄는 스위치 역시 문 밖 복도에 있다. 설령 조사실 안에 피조사자가 혼자 남겨지더라도 그로 하여금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 심지어 대소변을 보는 모습까지도 감시당하고 있다는 무언의 신호를 주고자 했던 것이다. 마치 미군이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이라크인들을 발가벗긴 채 질질 끌고 다녔던 것처럼, 신체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상대를 심리적으로 위축시키고 스스로를 인격적 파멸로 몰고 가게 하는 강온양면 고도의 심리적 압박 전술이다.

삐그덕거리는 마찰음에 인상을 찌푸리며 509호실 문을 여니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국화 한 송이와 앳된 박종철의 흑백 사진 한 장만이 물끄러미 방문객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경 너머의 표정이 너무나도 평온해 그가 이곳에서 고문을 받다가 숨졌다는 사실이 잘 믿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진에서 시선을 거두는 순간, 고문의 추억은 이내 현실처럼 다가왔다. 철망으로 싸인 형광등 불빛 아래 바닥을 제외한 벽면과 천정이 모두 방음 장치로 뒤덮여 있던 것이다. 창 밖의 민간인 거주지로 비명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다. 책상 한 개와 의자 두 개, 그리고 철로 된 간이침대는 모두 굵은 나사로 바닥에 굳건하게 고정되어 있다. 피조사자가 자해를 하거나 그것을 들어 조사관을 가격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조사실 면적은 고작 13제곱미터 남짓하지만 그 안에는 욕조까지 설치되어 있다. 특이하게도 욕조의 길이는 고작 120여 센티미터로 성인 한 사람이 눕기 힘들 정도인 반면, 깊이는 60센티미터 정도로 꽤 깊다. 피조사자의 청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위해 고안한 시설들이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는 폭이 15센티미터는 될까 싶은 유리창이 있다. 피조사자의 투신을 막고, 행여 고문을 받다 죽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을 것이라는 고립감을 느끼게 하려고 일부러 좁게 만든 것이다.

이처럼 겉은 시대를 초월하는 세련미를 자랑하면서도 그 내부는 지극히 지능적으로 설계한 이는 아이로니컬하게도 당대 가장 유명한 건축가이자 ‘한국 현대건축의 풍운아’라 불렸던 김수근이다.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을 비롯해 서울지방법원 청사와 남산 타워호텔(현 반얀트리호텔), 자유센터, 세운상가, 워커힐호텔 더글라스하우스, 대학로의 샘터 사옥과 율곡로의 공간 사옥(현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지금은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이라고 부르는 옛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 등 방방곡곡 진진포포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작품을 남긴 건축가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치안본부청사, 육사 교훈탑 등 3공화국부터 5공화국까지 군사정권의 뜻에 따른 건축물을 주로 설계했다는 점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다. 특히 피조사자들의 인권이 무참히 유린될 수 있도록 너무나 계산적으로 잘 설계한 남영동 대공분실은 그에겐 씻을 수 없는 치명적 오점이 아닐까.

박종철과 그를 고문했던 경찰관들, 그리고 그 소수의 경찰관만 꼬리 자르기 식으로 구속하고 뒤에 숨어 영달을 이어간 권력과 그들의 기대에 부응했던 유명 건축가…. 박종철이 죽음을 도화선으로 활활 타올랐던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약 28년이 흘렀다. 과연 지금의 한국 사회는 무수한 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해가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민주사회란 목적지에 어느 정도 다다른 것일까.

대공분실 답사를 마치고 나오던 길에 맞딱뜨린 정문의 모양새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느낌을 불현듯 받았다. 1미터는 족히 됨직한 육중한 두께의 검은색 미닫이 철문이 언제부턴가  담 옆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바깥에 있는 여닫이 문은 새하얀색으로, 그것도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문으로 바뀌어 있다. 세련되어 보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지극히 음습한 느낌을 주는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어울리지 않은 분칠을 한 모습이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이 문을 닫고 경찰청 인권센터가 개관한 지 어느새 10년…. 최대한 당시의 모습을 보존해야 하는 것이 역사의 현장을 대하는 기본 중의 기본일텐데 대공분실을 대하는 경찰 나아가 우리 사회의 시각이 변화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대 교정에 서있는 온화한 표정의 박종철 흉상이 아무런 말이 없는 것과는 반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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