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노무현이 태어나고, 자라고 잠든 땅 : 봉하마을

노무현이 태어나고, 자라고 잠든 땅  : 봉하마을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한국 현대사에서는 유독 4월과 5월에 잔인한 일들이 많이도 일어났다. 1948년 4.3항쟁, 1960년의 4.19혁명, 1980년의 4.21사북항쟁이 4월에 일어났고, 1961년에 일어난 5.16 군사쿠데타, 1980년의 5.18 광주항쟁은 5월의 비극이었다. 그리고 이런 ‘전통’은 놀랍게도 21세기에도 계속되었다. 작년의 4.16 세월호 참사와 6년 전 5.23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인 서거가 4월과 5월을 더욱 잔인하게 만들고 말았다.

김수로 왕이 세운 가락국의 영토였던 김해에 자리잡은 봉하마을. 왜군의 침입을 알리던 봉화가 있는 봉화산 밑에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높이는 136m 밖에 안 되서 사실 산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 주위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평야가 펼쳐져 있어 시각적으로는 상당히 높아보인다. 이 산 밑에 있는 이 마을에서 부산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였고 16대 대통령이 된 노무현이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9월 1일에 태어났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1975년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나올 때까지 여기서 살았고, 2003년 2월 퇴임 후 1년 3개월의 짧은 ‘봉하의 봄’을 보냈으니 부산상고 다니면서 하숙하던 시절과 군 복무 기간만 제외하면 63년의 인생 중 절반을 이곳에서 보낸 셈이다.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부산의 어망회사에 입사했다가 얼마 안 되서 그만두고 고시공부를 시작한 곳도 봉하마을이었다. 그래서 조그만 초막을 지었는데 이름만은 그럴 듯해서 옥을 다듬다는 의미의 마옥당 磨玉堂 이었는데, 물론 그 초막은 남아있지 않지만 생가는 복원이 되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복원된 생가.

최전방 인제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그는 한 살 아래의 처녀 권양숙을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지금은 벚나무와 메타 세콰이어가 심어졌고 생태공원이 된 화포천을 걸으면서 말이다. 둘은 1973년 결혼했고, 2년 후에는 사법고시 합격이라는 기쁨을 맛본다. 노무현은 대통령 당선 때보다 이 때의 기쁨과 성취감이 더 컸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이 마을을 떠나 대전에서 반 년여의 판사 생활을 하고 부산에 내려와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 후 인권 변호사가 된 과정은 천만 관객이 본 영화 <변호인>에서 잘 나타나 있다. 10년 후 그는 국회의원이 되어 서울로 갔고, 여러 번의 낙선 등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이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에 가기 전에 살았던 명륜동의 빌라를 처분한 상황이라 사저가 없었다. 2006년 쯤 되자 퇴임 이후 살아야 할 집이 필요했다. 아직 최종적인 성공여부를 따지기는 이르지만 참여정부의 핵심 정책은 지방분권이었다. 이 정책을 세워 남들에게 지방으로 내려가라고 권한 그가 퇴임 후 다른 대통령들처럼 퇴임 후 서울에 머물러 살 수는 없었다. 이 때쯤 권양숙 여사가 봉하 귀향을 권했고, 결국 새 집을 지어 이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실 재임 때는 그렇게 인기가 있었던 대통령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귀향은 그야말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박’을 터뜨렸다. 전국에서 엄청난 숫자의 방문객들이 아무것도 없는 이 곳에 찾아왔다. “대통령 님! 나와주세요!” 라는 방문객들의 합창이 봉하마을을 울렸다. 심한 경우 열한 번 인사하러 나간 날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날은 당연히 몸살이 나 끙끙 앓아야만 했다. 봉하마을은 전국적으로 주목 받는 장소가 되었고, 이렇게 ‘봉하의 봄’이 시작되면서 이런저런 단장이 이루졌고 이 작은 시골마을은 변신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시민들을 만나던 장소에 세워진 기념 사진판 

왜 사람들은 고향에 내려와 화포천 청소나 하고 오리 농법으로 농사지을 궁리나 하고 손녀와 자전거나 타는 현직에 있을 때는 인기가 없었던 전직 대통령을 보려고 안달이었을까? 바로 평범한 시민으로 돌라온 ‘첫 대통령’ 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김해 옆 밀양에 지역구를 둔 ‘원조 보수’ 김용갑 의원조차 이 귀향을 두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인기’는 오히려 화근이 되었고, 결국 온국민을 충격과 비탄에 빠지게 만든 2009년 5월 23일의 비극을 낳고 말았다. 강산이 6할 쯤 바뀔 시간이 지난 지금 봉하는 그가 있을 때보다 많이 바뀌었다. 그의 염원이었던 화포천의 단장은 물론 추모의 집이 세워져 그의 연보와 유품 그리고 사진들이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또 그 곳에는 우리시대의 대표적인 조각가 임옥상의 작품인 노무현 동상도 있다.  

대지의 아들인 노무현을 형상화했다

물론 봉하마을의 가장 중심은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과 국가보존 묘지 1호인 그의 묘역이다. 이 두 곳은 우리시대의 건축가 중 하나인 승효상의 작품이기도 하다. 시민들의 그리움을 담은 박석이 마음을 애잔하게 만든다. 이 두 곳 위에는 비극의 현장인 부엉이 바위가 내려다 보고 있다.    


시민들의 절절한 마음을 담은 박석들

세계 어느 나라나 지도자들의 자택이나 무덤을 역사적 현장으로 보존하는 경우가 많고 특별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지도자가 태어난 곳과 자란 곳, 연애하고 결혼한 곳, 마지막을 보낸 곳, 무덤이 일치하는 장소는 이 곳 봉하마을이 유일하지 않을까? 

그는 성공한 대통령, 위대한 대통령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보다 사람 냄새나는 대통령이었으며, 무엇보다 성공한 시민이고자 했던 만년 청년이었고, 성공한 시민이고자 했던 인물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통령으로서의 그보다 꿈이 많았던 청년 노무현, 평범하지만 성공한 시민으로서 고향에 봉사하고자 했던 노무현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곳 봉하마을 이다.

작 년 이맘 때쯤 그에 대한 글에 붙은 댓글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미워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리워 할 수밖에 없는 남자 노무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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