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리뷰] `먹고사니즘`의 주문 - 용산참사 5주기를 맞아, <두 개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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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니즘’의 주문 - 용산참사 5주기를 맞아, <두 개의 문>
우리 정말 안녕들 한 건가


 글 성지훈/ acesjh@gmail.com 

 

 

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 한복판 용산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서울시와 삼성물산이 주축이 돼서 진행한 용산국제업무지구 재개발 사업으로 강제 철거된 철거민들의 농성 중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뿐 아니라 당시 사건으로 장애를 입은 이도 있고 그 화마 속에서 평생 씻지 못할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도 있다. ‘용산참사’로 일컬어지는 이 사건에 구구절절하고 세세한 설명은 어쩌면 필요하지 않을 테다. 우리는 모두 그 날 저마다의 눈으로 이 참극을 지켜봤고 그 비릿했던 기억을 잊기에 5년은 너무 짧았다. 하물며 그 날과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는 수많은 참극들이 되풀이되는 대한민국에서는 더욱. 

 

# 2009년 1월의 기록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두 개의 문>의 포스터를 마주하게 되면 그 제목에서 마치 손에 땀을 쥐는 흥미진진한 추리활극을 떠올리게 된다. 혹은 용산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라는 약간의 사전정보를 들고 영화를 마주하면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경찰의 과잉진압을 고발하는 영화를 염두에 두게 된다. 그러나.

 

<두 개의 문>은 관객을 선동해 모두가 화내고 슬퍼하다 영화의 말미에는 마침내 “진실을 규명하고 정권에 책임을 묻겠다”는 결기어린 다짐이 샘솟게 하는 영화가 아니다. 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까발려 사회적 공론을 형성하겠다는 야심찬 영화도 아니다. 영화는 그저 여기저기서 모아 온 용산참사 당시의 사건 필름들을 지루할 정도로 보여 줄 뿐이다. 그리고 지루한 법정공방. 수 천 쪽의 법정 기록을 읽고 채집하며 증언을 기록하는 작업. 영화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그 무엇을 밝혀내려는 욕심도, 관객들에게 분노하고 슬퍼하라며 부추기는 목적도 없다. 그저 지켜보고 기록하는 것.

 

그리고 오히려 영화를 보고 난 후 우리는 더욱 알 수 없게 된다. 공권력 남용에 대한 규탄으로 이 참사를 바라보기에 그 대상인 경찰특공대 대원들은 혼란스러웠고 공포심에 떨고 있었으며 그들이 열어야 할 문이 무엇인지, 그 문을 열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도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런 면에서라면 이 영화는 차라리 스릴러에 가깝다. 차례로 사람들이 죽어나가지만 범인이 누군지는 모르고 그저 공포에 떨며 서로를 의심하는 일밖엔 못하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6명의 사람이 화마에 휩싸여 죽어갔는데 우리는 그 범인이 누군지 여전히 모른다. 영화 속 법정 장면은 범인의 죄를 밝혀내는 과정보다는 차라리 범인이 누군지를 찾는 과정에 가까워 보였다. 그 불길에 아버지를 잃은 아들은 범인으로 지목돼 교도소에서 4년여의 시간을 보내야 했고, 남편을, 아들을 잃은 ‘아줌마’들이 거리의 투사로 변해갈 동안에도 사람들은 이 ‘사건’의 범인이 누군지 밝혀내지 못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정작 피해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다.

 

# 무엇을 보고 있었나

 

 

영화에 사용된 화면은 두 가지다. (영화 중간에 삽입되는 인터뷰 영상들은 제외하고) 하나는 칼라TV를 비롯한 진보언론매체들의 영상이고 또 하나는 경찰의 채증 영상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동안 쉽게 보지 못했던 채증영상을 통해 보이는 현장이다. 두 영상을 각각 씨줄과 날줄이라고 한다면, 두 실이 엮어내는 천이 전혀 성기거나 어색하지 않다. 그들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것을 보고 있었던 까닭이다.

 

경찰의 채증영상은 매우 흔들리고 혼란스럽다.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몰랐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화염병을 두려워했던 것처럼. 망루안의 사람들이 위대한 혁명을 바라는 투사나 사회의 전복을 바라는 폭도가 아니었던 것처럼 이들 역시 잔인한 살인마도, 피도 눈물도 없는 전투기계도 아니었다. 그 순간 그 곳에서 철거민들과 경찰특공대 양쪽 모두는 겁에 질렸고, 상황을 강요받았다. 그 곳은 마치 서로 죽일 것만을 강요받던 콜로세움이었다.

 


앵글 한 번 변하지 않는 인터뷰와 흔들리는 채증영상. 영화는 집요할 정도로 그 혼란과 공포, 그리고 그 후에 찾아온 이 잔인한 고요에 관객을 반복해서 끌어들인다. 경찰특공대의 그 그악스러운 잔인함은 어쩌면 공포심의 발로였을까.

 

콜로세움의 검투사들은 대부분 노예였다. 그들은 싸울 것을 강요받았고 사람들은 열광했다. 권력은 그 열광을 지배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럼 콜로세움에서 사람이 죽었다면 살인자는 상대 검투사인가, 아니면 콜로세움 경기를 조장한 권력인가. 혹은 열광을 보내던 관객들인가. 그 피해자는 잔인하게 목이 잘린 검투사 노예일까 아니면 열광의 대가로 자신들을 착취를 망각해 준 관객들일까.

 

# 여러분 부~자 되세요

2000년대 초반 한 신용카드 광고의 카피였던 “부~자 되세요”는 모델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카피는 온 나라의 주문이 됐다. 어딜 가든 사람들은 서로 부자가 되라고 말했다. IMF를 지나면서 신용카드를 비롯한 금융 자본의 비대화가 한국 자본주의의 최대 목표가 된 시점이다. 인생의 모든 가치는 돈으로 환산될 뿐이고, 인격은 그저 `돈`으로 추정됐다. 돈이 곧 삶의 유일한 목표이고, 종교가 되어버린 것.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6명의 사람들이 죽었을 때 ‘책임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고 외면했다. 철거민들의 죽음은 경찰의 과잉진압 때문이었고, 경찰의 죽음은 전문시위꾼 폭도들의 폭력 때문이 됐다. 이 외면과 전가의 무책임함에서 ‘대중’이라고 불리는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우리는 대통령 한 명에게 화살을 돌리거나 과잉된 공권력을 탓하며 거기서 한 발 물러설 알리바이를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로마의 권력자들은 콜로세움으로 대중들을 통제했다. 그러나 그 살인 유희에 열광을 보낸 것은 대중이다. 열광이 호출한 잔인함. “부~자 되세요”라는 주문이 호출 한 것은 무엇일까. 어느 술자리에서 ‘용산참사’이야기로 목에 핏대를 세우던 우리는 집에 돌아와 주식 시세표나 집값의 오름 추이를 뒤적거리고 아이들에겐 공부해서 명문대가고 좋은 직장 가라는 ‘주문’을 외우진 않았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모든 문제의 원인은 과도한 경제숭배에 있다. 일종의 ‘먹고사니즘’ 태안 바다에 기름이 쏟아졌을 때 도대체 우리는 얼만큼이나 시체 썩은 기름을 소비하며 살고 있었을까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 이는 많지 않았다. 한적한 시골 농토에 ‘서울사람들만’ 쓸 전기를 공급할 송전탑이 들어설 때, 이웃나라에서 역대최고급의 방사능 유출이 일어났음에도 신규원전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 숱한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는 반도체 기업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할 때 우리는 다시 용산참사를 호출하는 주문을 외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

 

# 다시, 두 개의 문

 
영화에서 ‘두 개의 문’은 얼마나 성급하게 경찰이 투입됐는지, 심지어 이들의 안전조차 보장되지 못했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로 작용하며 동시에 관객들에게 또 다른 메타포로 다가온다. “ 두 개의 문이 당신 앞에 놓였을 때,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하는 질문.

 

감독들은 기획의도에서 “관객대중 스스로 어떤 위치에서 이 사건을 경험하고 해석하고 기억하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보는 것, 스스로 용산참사의 진상규명과정에 동참시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녀들이 말하는 진상규명과정이란 경찰이 망루를 때렸는지, 시너가 얼마나 쌓여있었는지, 경찰이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는지를 판가름 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사건의 정황과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엇보다, 용산으로 대변되는 이 ‘먹고사니즘’의 풍경을 호출하는데 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 그건 가치의 전환이다. 인간적 삶에 대한 복원.

 

수전손택은 “꼭 강해지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2014년 1월의 기록

이 글을 쓰고 있는 2013년 12월 22일 현재, 경찰은 백여 명의 사람들을 연행하며 정동 경향신문 사옥 내에 소재한 민주노동조합총연맹 (민주노총) 사무실을 침탈했다. 파업 중인 철도노조 위원장이 민주노총 사무실에 있다는 ‘제보’가 있었다고 한다.

 

건물 유리문을 파손하고 출입을 통제하는 십여시간의 작전이 펼쳐졌다.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시민들은 “철도노조 위원장은 이곳에 없다”며 경찰을 제지했고 경찰은 시민과 조합원 100여 명을 연행하면서 작전을 강행했다. 역시나 경찰이 찾던 철도노조 위원장은 거기에 없었다. 더욱이 법원은 경찰에 ‘체포영장’을 발부했을 뿐 ‘수색영장’은 발부하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경찰은 헌법의 영장주의를 위반하면서 언론사 건물에 침입해 노동조합 사무실을 수색했으며 그마저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채 물러나야했다는 것이다.

 

5년전 이 맘때, 재개발 사업을 위해 십 수 명의 철거민들이 올라 “살겠다”고 외치던 망루를 공격하던 모습과 놀랍도록 유사해 보이는 건 그 때도 지금도 추운 겨울이어서만은 아니다. 공적 재산인 토지와 철도를 사적 소유의 대상으로 만드는 사회의 ‘주문’이 사뭇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고액연봉자 주제’에 파업씩이나 한다며 손가락질을 하는 오늘의 모습에서 보상금을 더 받으려고 떼거리를 쓴다고 비판하던 어느 날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 덧

민주주의를 간단히 정의하자면 “자신의 삶에 자신이 주체가 되는 것”이겠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일이란 어쩌면 아주 간단한 일이다. 내 삶을 좌우지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는 것. 내 삶을 결정하는 나의 욕망이 주식시세표인지, 부동산시세표인지. 혹은 우리의 행복을 규정하는 것이 우리 자신인지 아니면 이 먹고사니즘의 사회가 규정한 “부~자 되세요”라는 주문인지.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자신에게 물어보자.

 

진짜, 정말 우리는 안녕들한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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