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페미니즘 – 이 싸움엔 당사자 아닌 이들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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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페미니즘 – 이 싸움엔 당사자 아닌 이들이 없다 

 

글 성지훈/ acesjh@gmail.com 

 

어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재미있는 글을 봤다. “어쩌면 지금 6.25 이후 최대의 내전을 보고 있는지 모른다”는. 서로 다른 정치색으로 상호비방을 일삼던 커뮤니티의 이용자들이 힘을 합치기도 한다. 이른바 ‘좌우합작’이란다. 입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한마디씩 말을 보태고 있다. 이 싸움엔 당사자가 아닌 이들이 없다.

논쟁은 ‘메갈리아’라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진앙지로 한다. 메갈리아는 한국사회의 남성중심적 사고와 양태를 ‘미러링’한다. 이를테면 가슴크기로 여성들의 존재를 품평하길 즐겨하던 남성들에게 고추의 크기로 품평받는 괴로움을 돌려주는 일이다. 미러링은 메갈리아라는 이름의 어원이 된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에 등장하는 방식이다. 소설 속 이갈리아는 현재의 사회구조에서 여성과 남성의 위치를 정확히 뒤집어 놓은 세계다. 미러링의 세계. 미러링 이후 싸움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미러링을 “혐오를 혐오로 되갚는 방식”이라며 메갈리아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페미나치, 페미파쇼 같은 말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리고 어느새 “이게 진짜 페미니즘”이라는 ‘가르침’이 등장했다. 그 가르침의 종류야 워낙 다양하지만 어쨌든 공통점은 하나다. “메갈리아를 비롯해 지금 여성주의 진영이 하고 있는 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라는 주장. 쉽게 말하면 “내가 기분 나쁘면 페미니즘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 메갈리아와 여성운동 진영은 모종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져보면 한국의 역사에서 이렇듯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자주 언급된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그 덕분에 한국의 남성들, 그러니까 한남충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기초적 이해조차 부족하다는 슬픈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지 않았나.

하여 이번 다큐리뷰는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르면서 ‘진짜 페미니즘’을 주창하는 지질한 한국 남성들에게 추천하는 몇 편의 영화들이다. 부디 바라건대 “나는 한남충이 아니”라는 자족적 착각이나 “별로 관심이 없다”는 쿨게이들이 이 추천 다큐들에 더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 말했다시피 이 싸움엔 당사자가 아닌 이들이 없다.

# 남성성과 여성성 – <3 X FTM>

<3 X FTM>은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을 전환한 3명의 트랜스젠더들의 이야기다. 카메라는 세 명의 FTM(Female Toward Male)을 인터뷰하고 일상을 따라다닌다. 감독은 남성의 경험과 기억을 지닌 채 여성의 신체가 되길 바라는 MTF(Male Toward Female)와 여성의 경험과 기억을 지닌 채 남성이 되길 바라는 이들 FTM의 차이에 주목한다. 그건 여성의 육체, 혹은 여성성이라는 위치, 그리고 가부장제 속에서 정형화된 여성다움이 강요될 때 겪는 불편함의 지점이다. 비성전환 여성들 역시 다양한 맥락에서 남성으로서의 삶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길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걸을 때, 생리할 때, 남동생에게 저녁을 차려주지 않는다며 부모에게 핀잔을 들을 때 등등. 영화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된 성역할을 직면해야 하는 여성의 삶에서 남성 신체로의 이주를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다.

영화는  다수의 성전환자를 다루면서 FTM으로 살아가는 삶의 다양성을 담아낸다. 다양한 사례는 FTM이라는 존재를 어느 한가지의 유형으로 단순화하는 우를 방지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은 FTM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각기 다른 삶의 관점들을 갖는다. 그들은 호르몬주사를 맞을 때 느끼는 일치감 정도에서부터 차이를 보인다. 자신을 남성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천생 남자’라고 말하거나 남성과 여성의 경계에 대한 고민을 회고하고, 어쩌면 사회가 자신에게 요구한 것이 남성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남성과 여성으로 양분된 사회체제에서 그들은 여느 누구들처럼, 혹은 누구보다도 외부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기에 호르몬 주사를 맞고 수술을 준비한다. 일반화된 규정들로 고착된 외부와 갈등하는 상황. 그들은 자신의 신체 자체로 이미 사회를 향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정을 호소한다.

트랜스젠더, 자신의 삶과 성의 속성을 선택한 이들을 통해 우리는 여러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내가 포기하거나 납득하고, 선택하는 여성과 남성은 그 자체로 순수한 속성을 갖는 것인지. 그것들은 상당부분 사회에 의해 구성된 성은 아닐지. 그렇다면 내가 원하거나 사회가 원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은 무엇인지. 사회가 강요하고 고정한 여성성과 남성성의 성역할과 굴레에 나는 얼마나 젖어있는 것인지.

# 세상을 바꿔왔다고 말하는 남자들에게 – <우리들은 정의파다>

지금은 방송인이자 작가가 된 전직 장관은 과거 자신이 창당한 정당에서 성폭력 사태가 발생하고 이것이 문제가 되자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를 줍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당의 공식 게시판에 "당내 여성주의자들은 당이 아니라 여성들의 '권익'만을 중시하는 것 같다“는 글을 썼다. 큰 것, 대의를 위해서는 일상의 차별에 눈을 감으라는 논리다. 거대한 진보가 이뤄져야 여성들의 인권도 향상된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정말 여자들의 조개줍기는 남자들의 대의를 방해해 왔을까.

이혜란 감독의 <우리들은 정의파다>는 1970년대 동일방직에 생긴 국내 최초의 여성 민주노조의 이야기다. 이 회사에는 일찍이 1946년 노조가 결성되었는데, 노동자의 대다수가 여성이었지만 1972년까지 23대에 걸친 역대 위원장은 모두 남성이었다. 1972년 5월10일의 동일방직 노조의 정기 대의원 대회에서는 이변이 일어났다. 여성 후보인 주길자가 회사의 지원을 받는 남성 후보를 큰 표 차이로 누르고 지부장에 선출됐다. 여성 지부장이 출현하고 남성 중심의 어용 노동조합이 여성 집행부가 주도하는 민주적인 노조로 탈바꿈하자,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여자도 능히 지부장 노릇을 할 수 있고 오히려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됐다. 여성 노동자들은 생리휴가를 챙길 수 있게 됐고, 월차도 돈으로 주던 걸 찾을 수 있었다. 화장실도 조금은 자유롭게 가게 되고, 현장 관리자들의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횡포가 사라져갔다. 식당 메뉴도 달라졌다. 여성노동자들과 여성 노조지부장을 못마땅하게 여긴 건 회사보다 오히려 남성 노동자들이었다. 1978년 2월21일, 새로운 노조지부장을 뽑기로 한 대의원 대회날 남성 노동자들은 대의원 대회장에 난입해 조합원들에게 똥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대회장 경비를 위해 나와있던 경찰들은 낄낄거리며 이 광경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동일방직 노조에서 여성 지부장이 출현한 이후 1974년에는 반도상사 부평공장에서, YH무역 에서 여성 지부장이 배출됐다. 지금이야 여성이 다수인 사업장에서 여성 지부장이 당선되는 것은 지 당연한 일로 보일 수 있지만, 여성의 사회활동에 대한 인식이 극히 미약했던 1970년대에는 하나의 사변이라 할 수 있었다. 동일방직 노조의 주길자 집행부는 정부의 통제아래 남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노조운동을 탄압해오던 한국노총 체제에 결정적 균열을 일으켰다. 방직 공장의 언니들이 한국 노동운동사의 거대한 획을 그어버린 사건이다. 영화는 1970년대를 비추지만 지금도 '언니'들의 투쟁은 낯설지 않다. 비정규직 법안을 오용하거나 육아 출산 휴가를 박탈하는 등 여성 노동자를 향한 불평등은 여전하다. KTX, 기륭, 이랜드, 한진중공업.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한국 노동운동의 진보를 선두에서 이끌고 있다. 세상을 바꿔왔다는 남자인 누구의 말대로라면, 언니들은 조개를 주워 해일을 막아내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 여성의 세계는 아직 거기에 있다

<성난 그녀 아름답다> (She’s Beautiful When She’s Angry)는 1967년에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다. 뉴욕의 낙태권 집회에서 벌어진 게릴라 연극을 촬영했다. 연극에선 자본주의자, 광고인, 남자친구, 어머니의 역할을 맡은 여자들이 한 젊은 여성에게 이상적인 여자가 되기를 요구한다. 여자는 예뻐야 하고, 아내로서 집안일을 무리 없이 해내야 한다라는 요구. 거리라는 무대 구분 없는 열린 공간에서 이들은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연기하고, 각 역할과 관계에 대해 토론한다. 관객들은 동의와 분노를 즉석에서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럼, 그짓 하지마!> (Y’a Qu’ a Pas Baiser)는 1973년 작이다. 영화가 제작될 당시 프랑스에선 낙태가 불법이었다. 영화는 당시 낙태에 대한 여성들의 사유를 조명한다. 낙태금지법을 여성에 대한 타율적인 통제로 보는 페미니스트들은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낙태 시술의 현장에 관객을 초대하는 것. 모종의 의식이자 선언이었던 이 충격적인 퍼포먼스는 여성이 법적이나 의학적으로 수동적인 통제의 대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건강을 위해 충분한 정보를 갖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주체로 전환됨을 알리는 과정이었다.

드니스 보스트롬 감독의 <여성건강보고서> (Healthcaring: From Our End of the Speculum)은 여성의 신체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영화다. 1976년 작. 감독은 여성의 몸과 영혼의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묻는다. 당시의 여성은 스스로 자신의 삶의 주체일 수 없었다. 이 영화는 역사적으로 여성의 몸이 남성 중심적인 과학의 대상이었다는 점을 비판하는 한편, 이제는 여성 스스로 자신의 몸과 경험을 들여다보고, 건강권을 행사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페미니즘 다큐멘터리의 주제의식은 사실 이 영화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영화들이 나온지 40년이 훌쩍 넘었지만 여성은 여전히 신체적 자기결정권을 갖지 못했다. 여성의 몸은 여전히 남성들의 성적 유희의 대상이다. 여성은 아이를 낳고 한없는 모성을 보유한 성녀이거나 아무 때고 다리를 벌리는 창녀다. 남성들의 세계에서 남성들이 만들었고 강요하는 규정이다. 성역할은 여전히 고정돼 있다. 여전히 여성들의 세계는 40년 전 뉴욕의 낙태권 집회현장에, 프랑스의 거리에 남아있다.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와 인권을 위해 싸워온 역사에 비해 그녀들의 성취는 미미하다. 6천년의 인류역사를 거슬러 올라야 하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수백 수천년 여성을 억압해 온 이들이 고작 미러링에 화들짝 놀라 폭력을 운운하는 사회라면. 그래서 오늘의 이 싸움이, 6.25 이후 가장 큰 내전이라는 이 싸움이 더욱 격해지고 치열해지길 바란다. 수천년을 지켜온 그 권력, 고작 고추를 달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가진 그 권력을 인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고추 권력을 가진 당신들이 이 언급한 다큐멘터리들을 봐주면 좋겠다. 당신이 어디에 서 있든, 어떤 입장이든 당신도 이 싸움의 당사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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