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제국> 막다른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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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제국> 막다른 자본주의 

​글 성지훈/ acesj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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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최저임금이 6,030원으로 결정됐다. 450원이 올랐다. 최저임금위원회가 열리는 동안 재계에선 줄기차게 동결을 주장했다. 언론은 최저임금이 찔끔 올랐다는 기사 옆에 그리스의 경제위기가 과잉복지 때문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는 동안 노동자들은 굴뚝 위로, 전광판 위로 올라갔고 세상에 빚을 지기 싫다던 세 모녀가 목숨을 잃은 후에도 생활고를 비관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은 끊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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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민주당은 ‘의료개혁’을 핵심 정책으로 내세웠다. 오바마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했던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의 기조연설에서 오바마는 “아들의 약값 4500만원을 마련하지 못해 눈물 흘리는 직장 잃은 아버지”를 위로했다. 그는 “모든 어린이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여전히 상위 1%가 전체 부의 43%를 차지하고 아이들 5명 중 1명이 밥을 굶고 있으며, 45명 중 1명은 모텔이나 자동차, 심지어 지하 배수구에서 생활하며 집 없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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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시장경제는 덩샤오핑의 유명한 ‘흑묘백묘론’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고양이는 검든 희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이 이야기는 “사회주의 잡초를 심을지언정 자본주의 싹을 키워서는 안 된다”는 마오쩌둥의 ‘잡초론’을 누르고 중국에 시장경제를 도입시켰다. 흑묘백묘가 등장하고 30년, 중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사회가 됐다. 그러나 동시에 상위 1%가 전체 부의 41%를 차지하고 모유를 팔아서라도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도시빈민과 매일 밤 슈퍼카를 몰고 고급 클럽을 찾는 ‘소황제’들이 같은 도시에 공존하는 모순도 함께 찾아왔다. 

#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본주의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는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애초에 그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담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을 주창한 이래로 ‘자본주의’는 인간사회에 최적화된 시스템인 양 군림했다. ‘사회주의’를 대표하던 소련이 무너지고서는 그 독주를 견제할만한 어떤 것도 나타나지 않을 듯 보였다. 그러나 지금 자본주의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2008년 세계 자본주의의 총화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생하고 자본주의의 병증은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스티글리츠는 “미국의 사회적 불평등은 100년 만에 최고조에 달했다”고 말했다.

<최후의 제국>에 등장한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 129번 도로 변 모텔촌에 사는 사람들은 집이 없어 모텔에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이다. 그들은 보증금 낼 돈이 없어 집을 잃었거나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해 은행에 집을 빼앗긴 사람들이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교회의 구호식품으로 연명한다. 그마저 소스도 없는 생 파스타다. 하루 종일 일해서 번 돈은 대부분 모텔의 숙박비로 지출된다. 그러나 그런 싸구려 일자리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다. 공장과 기업은 더욱 싼 인건비를 찾아 나라 밖으로 떠난다. 하루 아침에 떠난 기업들이 남긴 것은 실직과 빈곤, 그리고 절망이다. 


그들이 먹는 구호식품은 대부분 유통기한을 하루 남기고 폐기처분되기 직전인 음식들이다. 유통기한이 다 될 때까지 팔리지 않을 만큼 음식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음식이 없어 배를 곯는 이들이 있다. 음식을 먹을 사람도 있고 먹을 음식도 있지만 정작 음식을 먹는 사람은 없는 모순.

반면에 보험회사 CEO인 스티븐 마리아노는 1천만 달러짜리 집에 살면서 21만 달러짜리 승용차를 타고 출근한다. 12만 달러짜리 야구장 전용권으로 여가를 즐기고 상담 1회에 9백 달러를 받는 주치의를 두고 있다. 자산규모가 6천5백억 원인 그의 보험회사는 금융위기의 불안감을 먹이로 승승장구한다. 그는 “돈은 사람을 당당하고 독립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말한다. 그 말은 곧 “돈이 없으면 사람은 당당하지도 독립적일 수도 없다”는 말일까. 


# 누구의 경제민주화, 누구의 복지 

CNN의 한 토론 프로그램, 진행자는 미국 하원의회의 론 폴 의원에게 묻는다. “의료보험이 없는 사람이 치료비가 비싸게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론 폴 의원은 답했다. “그게 자유입니다,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죠.” 진행자가 다시 물었다. “돈 없고 의료보험 없는 사람들은 죽도록 내버려둬야 합니까” 이번에는 론 폴 대신 론 폴의 지지자로 보이는 방청객들이 한 목소리로 답했다. “YES”

미국의 보수세력에게 ‘사회주의자’라는 지적까지 받았던 오바마는 줄곧 ‘경제민주화’를 주창했다. 그는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고 따뜻하게 입히고 밤에는 아이들을 잠자리에 눕히고 안전하게 그들을 지켜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의료개혁’으로 대변되는 그의 경제민주화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해 임기 말을 맞고 있는 지금까지도 올랜도 모텔촌에 사는 8살 세라는 아플 때 병원에 가지도, 배고플 때 배불리 먹지도 못한다. 그의 부모가 가난하기 때문이다.

올랜도 모텔촌에 살고 있는 이들은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되던 그가 우리로부터 무엇을 빼앗아 갈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공화당의 조지부시든,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든 결국 다를 것이 없다. 

한국의 정치판도 그랬다. 여야, 보혁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말했다. 저마다 모두 자기들이 민생을 책임지고 서민이 잘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다. 야당의 구호가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였는지 여당의 구호가 ‘유능한 경제정당’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를 게 뭔가, 서로 자신의 경제민주화가 ‘진짜’라고 우긴다. 어느 한 쪽의 경제민주화가 ‘진짜’라면 다른 한 쪽도 ‘진짜’일 수밖에 없다. 그들의 경제민주화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장난 고물 라디오에서 무한 반복되는 철지난 유행가같은 ‘경제민주화’가 이 불안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재벌을 개혁하고 복잡한 금융공학을 동원해 부채를 탕감하겠다는 ‘법’과 ‘제도’가 공장에서 쫓겨나 굴뚝에 오르고 밥을 먹지 못하고 병원에 가지 못하는 이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맑스는 “사회가 법에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회에 기반을 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민주화를 표방하는 정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보호’, ‘금지’, ‘제한’, ‘강화’, ‘의무화’ 같은 말들이다. 오늘, 경제민주화의 주체는 ‘밥을 굶고 있는 이들’이 아니라 ‘밥을 남기고 있는 이들’인 것이다. 한 치도 어긋나지 않은 시혜의 언어. 최저임금을 450원 올려주며 대단한 양보라도 해낸 양 으스대는. 어쩌면 보호와 금지, 강화, 제한 같은 말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밥을 남길 수 있는 권리’일지도 모르겠다.

# 오래된 미래

“한 농부가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것이 다른 농부에게 흉작을 초래하지 않는다. 경쟁이 아니라 상호부조가 이곳의 경제를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곳은 공생의 사회인 것이다” - 오래된 미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최후의 제국>에 등장하는 브록파 마을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Helena Norberg-Hodge)의 ‘오래된 미래’에 등장하는 ‘라다크’의 마을이다. 

브록파 마을에선 밭에 나가 일 하는 동안 아이들을 이웃이 돌봐준다. 특별히 누가 부탁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사정과 필요한 도움을 알고 있다. 그들은 “마을의 아이는 우리 모두의 아이”라고 말한다. 

특별한 제도가 마련돼 있는 것은 아니다. 이웃의 아이를 돌보지 않으면 일정한 규제가 가해지는 것도 아니다. 정부가 나서서 공동육아를 권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척박한 환경에서도 함께 ‘공생’하고 있다. ‘무상보육’이나 ‘공동육아’ 같은 말들이 이념논쟁의 소재로 등장하고 무상급식을 둘러싼 논쟁이 수도의 시장까지 갈아치워 버리는 사회에선 낯선 풍경이다. 

산간마을, 척박한 토지의 브록파에는 풍족한 음식이 없다. 그러나 배를 곯는 어린아이도 없다. 그들은 잔치가 벌어지면 저마다 보리떡을 지어 나눠 먹는다. 한 덩이의 고기를 얻기 위해 한 마리의 소를 살처분 하는 이들과 하루에 한 끼 빈한한 식탁을 마주하기도 어려운 이들이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일 같은 것은 없다.


솔로몬제도의 아누타 섬은 인구 300명의 작은 섬이다. 이 곳의 아이들은 학교에 가면 청소를 한다. 수업시간엔 졸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칠판을, 어떤 아이는 옆자리의 아이를 바라보는 풍경은 여느 나라의 학교와 다르지 않지만 이곳의 아이들은 돈을 주지 않아도 학교에 간다. 

어른들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의 아이를 입양해 키운다. 한 집 건너 한 명씩은 입양된 아이다. 그러나 아누타 섬의 주민들은 입양된 아이를 ‘특별히’ 취급하지 않는다. 함께 식량을 구하고 함께 집을 짓는 아누타의 주민들에게 아이들은 ‘누구의 아이’기 보다는 ‘우리의, 공동체의 아이’다.

브록파도 아누타도 척박한 곳이다. 농사를 짓기에도 험난한 땅이며 바다는 거칠다. 먹을 것은 풍요롭지 않다. 스마트폰은 물론이고 TV도 없다. 아누타 섬에 들어가기 위해 <최후의 제국>제작진은 이틀간 엔진도 없는 돛단배를 타야했다. 척박한 환경이 아마 끈끈한 공동체를 만들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를 지켜줘야 했을 테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자본주의의 세상이 팍팍한 땅과 높은 파도보다 척박하지 않다고 말 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 지나가버린,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1960년대 히피즘과 반전운동의 기수였던 조안 바에즈는 노래를 불렀다. “Where's my apple pie?(내 사과파이는 어디에 있지?)”.

2011년 미국을 흔들었던 월가점령은 다소 미약한 결과로 끝난 것 같지만 1930년대 미국 공산당들에 이어 처음으로 미국인들은 자본주의 바깥에서 ‘사과파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경제민주화’라는 조금은 미심쩍은 말은 정치인들의 힘싸움에 전유되고 있지만 한국에서도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나누어, 함께 살아가는 일만이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원시공동체 사회엔 그랬다. 커다란 몸집도 날카로운 발톱도 없던 인간들은 서로의 체온과 서로의 어께를 빌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부족했으니 모든 것을 나눠야 했다. 그러나 그 때엔 한 구석에선 음식이 썩어 가는데도 한 구석에선 밥을 굶는 이가 발생하는 모순 같은 것은 없었다.

자본주의는 인류를 풍족하게 했다. 그러나 삶을 풍요롭게 하지는 않았다. 돈을 받기 위해 학교에 가는 미국아이들과 쌀푸대로 만든 가방을 짊어지고 학교를 청소하는 아누타의 아이들 중 어느 쪽이 더욱 행복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굳이 물을 필요가 없다. 법과 제도가 공동육아를 지시하고 이에 반발하는 정치인들이 이념공세를 퍼붓지 않아도 브록파의 아이들은 공동체와 함께 자란다. 이웃집 엄마가 나눠주는 밥을 먹고 자란 아이는 아마 자라서 제 이웃집 아이에게 밥을 나눠줄 것이다. 공짜 밥을 주기 싫다며 눈물 흘리며 자기 자리까지 내거는 어른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나중에 무엇을 나누어 갖게 될까.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wealth)’ 나라인 미국과 중국이 브록파와 아누타의 주민들보다 ‘잘 살고(Wellbeing)'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브록파와 아누타의 생활은 어쩌면 인류가 이미 지나온 길이다. 그건 신비롭게도 아직 남아있는 화석과도 같은 삶. 그러나 동시에 브록파와 아누타는 여전히 오지 않은 인류의 바라마지 않는 미래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마 최후의 제국, 자본주의의 경고를 무시하고 지금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지속한다면, 영원히 오지 않을 미래이기도 하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오래된 미래’에서 경고했다. 

“우리 자신의 본성, 우리 자신의 욕구가 지금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대중매체를 통한 선전이 아무리 광범위하고 끈질기게 끊임없는 경제성장을 밀어붙인다 하여도, 그것은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온전한 정신으로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하여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 자신의 본능적인 이해를 꺾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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