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신 - 경계의 삶을 사는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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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 -  경계의 삶을 사는 고통


글 성지훈/ acesjh@gmail.com 


무당이 되려면 작두를 타야한다. 시퍼렇게 날이 선 작두 위에 위태롭게 올라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고통스럽지 않을리 없다. 하지만 무당은 그런 존재다.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 어디쯤에 서서 양쪽이 끌어당기는 고통을 모두 제 몸으로 올곧이 견뎌야 하는 존재.

‘만신’은 중요 무형문화재이자 ‘나라무당’인 김금화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다. 만신은 무당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천대받던 무당이 나라를 대표하는 만신이 되기까지의 삶.

사이에서

 무당의 성장이란 어쩌면 고통을 앓아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겠다. 사람이든 귀신이든 결국 자신보다는 타인의 고통에 공명해야 하는 것이 무당의 숙명이다. 그렇다면 식민지의 땅에서 태어나, 사람이 무더기로 죽어나가던 전쟁도, 지긋지긋한 이념의 갈등도, 사람보다 물질이 앞서게 된 비인간의 세상까지 역사의 고통을 모두 앓았던 그녀가 세상과 공명하는 만신으로 성장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위로란 고통의 공명이다. 통증을 나누어 지는 일이다. 김금화는 그렇게 세상을 위로하며 살았다. 전쟁통에 죽어나간 어린 넋을, 80년 광주를 지켜냈던 시민들을, 무너진 백화점 잔해에 깔려 죽은 이들을, 그리고 얼마 전엔 진도 앞바다에 수장돼버린 어린 목숨들까지. 그녀는 늘 세상을 연민하고 사람을 위로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자신의 삶은 없다. 전장에서 간첩으로 몰려도, 미신을 단속한다는 공무원들에 쫓겨다녀도 그녀는 자신보다는 산 넋과 죽은 넋을 위로하고 화해시키는데 주력했다. 갈데 없는 외로움과 고통, 어쩌면 그것이 무당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세상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 무당의 일을 오늘에는 은막이나 브라운관, 스마트폰의 좁은 액정화면들이 하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 뉴스같은 건 일종의 굿이다. 그 위에서 세상과 사람을 이어주는 영매는 기자나 배우, 감독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니 그들은 일종의 현대판 무당이다. 세상과 세상, 사람 사이에서 그들은 고통에 공명하고 통증을 나눠 짊어져 세상과 사람을 연민하고 위무해야한다. 그것이 무당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김금화가 늙은 몸을 이끌고 다시 굿판을 벌인 건 인천의 연안부두였다. 생떼같은 300개의 목숨을 안고 침몰한 그 배가 출발한 곳이다. 2014년 4월 16일 그 일이 벌어지고 진도 팽목항에, 안산에, 서울 광화문 광장에, 여의도에, 청와대에 다치고 아픈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곳엔 그들과 세상을 화해시키고 관계맺게하고 이해시킬 ‘매개’들도 넘쳐났지만 여전히 모두가 아프고 괴롭다. 거개가 그들의 통증을 짊어지지 않았고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세상과 화해하지 못했다. 거기에 ‘만신’대신 기레기가 있었다. 

고통을 나눠지려는 대신 고통을 전시하는, 고통이 결국 타인의 것임을 확인하는.

무당이 되려면 작두를 타야한다. 시퍼렇게 날이 선 작두 위에 위태롭게 올라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고통스럽지 않을리 없다. 하지만 무당은 그런 존재다. 올곧이 아픔을 견뎌내며 이쪽과 저쪽의 매개가 돼주는, 그럼으로 세상과 사람을 관계맺게하고 화해하고 위로하는 존재. 나라만신 김금화가 말한 ‘만신의 고통’이다. 


공동체

"외기러 왔소, 불리러 왔소, 죽은 쇠를 받아다가 산 쇠를 만들러 왔소"

'걸립'은 새 만신이 신내림을 받기 전 마을을 돌며 내림굿에 쓸 무구와 쌀을 얻는 일이다. 집안에 오래된 죽은 쇠를 받아다가 산 쇠로 만들며 그 집 사람들을 축원한다. 

"이 쇠 받아다 큰 만신되세요". 

하나의 만신이 탄생하는 과정은 마을이 힘을 모으고 희망을 축원하는 일이다. 만신의 굿과 기도란 개인의 부귀나 영화가 아니라 공동체, 나아가선 세계와 소통하는 일에 더 가깝다.

조선시대까지 굿은 한을 풀고 고통을 극복케 해주는 정신적인 카타르시스를 제공했고 공동체 의식을 다지는 사회적 행사로 역할을 담당했다.

그래서 어쩌면 굿은 예술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사후의 구원을 보장하며 엄숙한 합창에 헌금봉투를 내미는 이들에겐 돼지머리에 만원짜리를 턱턱 붙이는 굿이야 천하고 해괴한 것이겠지만 사후에 올 세계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춤추고 노래하고 울다가 술마시고 춤추는 굿판이 더 효과적인 위로겠다.

배타적인 일자(一者)의 유일한 목소리만을 진실로 인정하고 부정된 나머지는 어떻게든 쫓아내려는 의식과 달리 자신 안에 들어선 타자의 다성(多聲)을 거부하지 않고 어떻게든 받아들여 제 안에 앉히려는 인간들의 몸부림.  제 방 구석에 모신 일자가 아니라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천하대장군 같은. 그건 장군님과 동자와 신령과 잡귀가 모두 만신의 몸을 거쳐 가능한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맺기를 시도하는 일이다. ‘저 혼자’가 아닌 ‘우리’로서 존재하는 신앙과 믿음.   

사실 공동체의 골자는 일체감이 아니라 다양함에 있다. 파편화된 세계에 사는 개인들의 지독한 타자화에서 벗어나는 일은  바로 레비나스의 윤리적 주장처럼, 타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길이다. 존재하는 다성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일. 공동체와 인간적 삶의 복원.       


다큐멘터리와 극의 경계

박찬경 감독은 굿이 오늘날 영화를 비롯한 대중예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듯,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넘나드는 연출을 보인다. 다큐에 캐릭터가 들어서고 현실의 인물과 극의 인물이 만나는 순간, 그러니까 경계성이 무너지며 경계의 삶이 드러나는 그 순간 만신 김금화의 삶이 더 애잔하고 슬프고 감동스러워진다. 

극은 김금화의 탄생부터 시작하며 배우들에 의해 재연된다. 어린 김금화, 넘새 역은 김새론이, 젊은 시절과 중년의 김금화는 류현경과 문소리가 각각 나누어 맡는다. 각 세대의 내로라하는 배우들을 김금화 역에 기용하면서, 재연 장면은 실제 이야기를 보조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김금화를 촬영한 다큐멘터리 장면과 동등한 위치까지 끌어올려진다.

극과 다큐멘터리가 섞이고 판타지와 실제가,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영화의 형식은 경계의 삶을 살아온 김금화, 그리고 경계의 삶을 살아가야 할 또다른 무당들, 만신들의 삶과 닮아있다.

그게 가장 잘 들어나는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쇠걸립 시퀀스다. 쇠를 얻으러 다니는 어린 넘세 김새론에게 "큰 무당이 되라"며 쇠를 건네는 건 어린 넘세가 살던 마을을 재연한 배우였다. 하지만 점차 나이든 김금화 류현경과 문소리, (그녀들은 극 중 김금화로 분한 모습이 아니라 촬영장에 온 여배우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카메라와 마이크를 든 스탭들. 그리고 마침내는 그를 지켜보는 김금화까지 어린 넘세에게 쇠를 건낸다. 

시간과 공간은 물론 극의 안과 밖,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모두를 넘나드는 장면은 이 세계와 저 세계를 넘나들며 경계위에 사는 삶을 가장 잘 표현한다. 



다시, 사이에서

언젠가 다니는 성당의 신부님이 미사 끝에 물으셨다.

"생명의 기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누군가는 '신앙'이라 답했고 신부님은 아니라고 했다.

“귀한 대답이긴 합니다만 믿음이 몸에 생명을 주는 건 아니지요”

누구는 '공기'라고 말했지만 신부님은 그 때도 고개를 저었다.

“그럼 숨만 쉬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엔 누가 '밥'이라 말했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몸이 소화시키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랍니까”

사람들은 이제 알았다는 듯이 '건강'이라 답했다.

“몸만 건강하고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진정한 삶이겠습니까”

누군가 큰 소리로 '사랑'이라 했고 신부님은 말했다.

“정말 그리 생각하십니까, 사랑만 있으면 밥 한 톨 못먹어도 살 수 있다고”

이쯤되자 이제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고 신부님께서 들려준 답은 이랬다.

“생명의 기본 원리는 '소통'입니다. 음식과의 소통, 내 몸과의 소통, 타인과의 소통, 자연과의 소통, 주님과의 소통. 우리는 소통하지 않고서는 잠시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TV를 켜면 대통령부터 코미디언까지 모두 소통을 이야기한다. 어지간히 관계맺지 못하고 살아가는 시대다. 하지만 정작 얼마나 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통증을 공유하는 일에 다름아니다. 관계가 깊어지는 시작과 전환점에는 통증에 대한 공감이 있다. 통증을 견디고 이해하고 넘어서는 일련의 과정을 보거나 나누는 것.

말로는 관계와 소통을 떠들지만 고통을 나누고 공명하는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사람들.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가 되기보단 타인의 고통을 전시하고 착취하는 렌즈에서 멈춰버린 시대의 영매들. 그 견고함의 경계위에서 여전히 시대의 아픔에 공명하고 통증을 짊어지는 만신의 삶에서 우리가 배우고 남겨야 할 것은 고작 중요 무형문화재만은 아닐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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